4월 17일 이른 아침에 변방의 급보가 처음으로 조정에 이르렀는데, 이는 곧 경
상좌수사 박홍朴泓의 장계狀啓였다. 대신들과 비변사가 빈청賓廳99)에 모여서 임금에
게 뵙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으므로 곧 글을 올려 청하여, 이일李鎰을 순변사
巡邊使로 삼아 가운데 길로 내려보내고, 성응길成應吉을 좌방어사로 삼아 왼쪽길로
내려보내고, 조경趙儆을 우방어사右防禦使로 삼아 서쪽길로 내려보내고, 유극량劉克良
을 조방장助防將으로 삼아 죽령竹嶺100)을 지키게 하고, 변기邊璣를 조방장을 삼아 조
령鳥嶺101)을 지키게 하고, 경주부윤慶州府尹102) 윤인함尹仁涵이 유신으로 나약하고 겁
이 많다고 해서 전 강계부사江界府使변응성邊應星을 기복起復103) 시켜 경주부윤으로
삼아서 모두 스스로 군관軍官을 가려서 데리고 가게 하였다.
그런데 잠시 후에 부산釜山이 함락되었다는 보고가 또 이르렀다. 이때 부산은 적
에게 포위를 당하고 있었으므로 사람들이 교통할 수가 없었다. 박홍의 장계에는
다만 말하기를,
“높은 곳으로 올라가서 바라보니 깃발이 성 안에 가득합니다.”
라고 하였는데, 이것으로써 부산성이 함락된 것을 알았다.
이일李鎰이 서울 안에서 날랜 군사 3백명을 거느리고 가려고 하므로 병조兵曹에
게 군사를 뽑은 문서를 가져다가 보았더니, 이는 다 여염집과 시정의 군사 경험
이 없는 무리들이었다. 이 중에는 아전[胥史]과 유생儒生들이 그 반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임시로 검열을 해보았더니 유생들은 관복冠服을 갖추어 입고 과거시험 볼
때 쓰는 종이를 들고 있었으며, 아전들은 평정건平頂巾104)을 쓰고 나와 있어 저마
다 군사를 뽑는 데서 모면하기를 애쓰는 사람들만 뜰안에 가득하여 가히 보낼 만
한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이일은 명령을 받은지 3일이 되도록 떠나지 못하므로
할 수 없이 이일로 하여금 혼자서 먼저 떠나게 하고, 별장 유옥兪沃으로 하여금
뒤따라 군사를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 나는 장계를 올려 “병조판서 홍여순洪汝諄은
맡은 일을 잘 다스리지 못하고, 또 군사들이 원망을 많이 하니 바꾸어야 하겠습
니다.” 하였더니, 이에 김응남金應南을 그 대신 병조판서로 삼고, 심충겸沈忠謙을 병
조참판參判105)으로 삼았다.
대간臺諫106)은 계청하기를, “마땅히 대신大臣을 체찰사體察使107)로 삼아 모든 장수
들을 검열하고 감독하게 하소서”하였다. 수상首相(이산해李山海)은 나를 추천하여 체
찰사의 명을 받게 하고, 나는 청원하여 김응남을 부사副使로 삼게 하였다. 전 의주
목사義州牧使김여물金汝岉108)은 무인으로서의 지략이 있었는데, 이때 그는 어떤 사
건에 관련되어 감옥에 갇혀 있었으므로 임금에게 계청하여 죄를 면해주고 자유로
운 몸으로 군사를 따르게 하였다. 그리고 무사들 중에서 비장裨將의 소임을 감당할
만한 사람을 모아 80여명을 얻었다.
조금 뒤에 급보가 연달아 들어왔는데, 적의 선봉이 벌써 밀양密陽․ 대구大丘를 지
나 장차 조령鳥嶺밑에 가까이 왔다고 알려 왔다. 나는 김응남과 신립申砬에게 일러
말하기를,
“왜적들이 깊이 들어왔으니 일은 이미 급하게 되었소. 장차 어떻게 하면 좋을는
지?”
하니, 신립은 말하기를,
“이일이 외로운 군사를 거느리고 전방에 나가 있는데 뒤따를 군사가 없습니다.
체찰사體察使(류성룡柳成龍)께서 비록 달려 내려가신다 하더라도 싸우는 장수는 아닙
니다. 어째서 용맹스러운 장수로 하여금 급히 달려 먼저 내려가게 하여서 이일을
응원하게 하지 않으십니까?”하였다. 내 신립의 뜻을 살펴보니 자신이 가서 이일을
구원하겠다는 것이므로, 나는 김응남과 함께 입금에게 신립의 말과 같이 아뢰니,
임금께서는 즉시 신립을 불러서 그 뜻을 물어보시고, 드디어는 신립을 도순변사都
巡邊使로 삼았다. 신립은 대궐문 밖으로 나가서 스스로 군사를 불러 모았으나 군사
로서 따라가기를 원하는 자가 없었다.
이때 나는 중추부中樞府109)에서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신립이 내가 있는 곳으로
와서 뜰안에 군관 응모자가 많이 늘어서 있는 것을 보고서 얼굴에 노기를 띠고 김판서金判
書(김응남金應南)를 가리키며 나에게 일러 말하기를,
“이분[金應南]을 대감께서 데리고 가서 무슨 일에 쓰시겠습니까? 소인이 부사副使
가 되어 모시고 가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나는 신립이 무사들이 자기를 따르지 않는 것을 노여워하여 하는 말임
을 알므로 웃으면서 말하기를,
“다 같은 나라 일인데 어찌 이것저것을 구분하겠는가? 공은 이미 떠날 길이 급
하니 내가 모집한 군관軍官을 데리고 먼저 떠나도록 하는 것이 좋겠소. 나는 곧
따로 모아가지고 따라가리라.”
하면서 인하여 군관의 단자單子110)를 주니, 신립은 드디어 뜰안에 있는 무사들을
돌아보며, “따라오너라” 말한 다음 곧 이끌고 나가니, 여러 사람들은 다 실심한 모
습으로 따라갔다. 김여물金汝岉도 역시 그와 함께 갔는데 속으로 몹시 좋아하지 않
는 듯하였다.
신립이 떠날 때 임금께서는 그를 불러보시고 보검寶劒을 주시면서 말하기를,
“이일李鎰이하의 장수들로서 명령을 듣지 않는 자에게는 이 칼을 쓰도록 하여
라.”
하셨다. 신립은 임금께 하직하고 나와서 또 빈청賓廳으로 찾아와서 대신을 뵌 다음
에 막 계단을 내려서려고 할 때 머리 위에 썼던 사모紗帽가 갑자기 땅에 떨어지니 보
는 사람들이 실색하였다. 그런데 신립은 용인龍仁에 이르러 임금에게 장계를 올렸는
데, 거기에 자기의 이름을 쓰지 않았으므로, 사람들은 혹시 그 마음이 산란하여진 것
이 아닌가 하고 의심하였다.
99) 賓廳: 궁중에 있어, 대신이나 비변사의 당상관들이 모여 중요한 일을 의논하던 곳
100) 竹嶺: 소백산맥의 동북부에 있으며, 경상도 풍기와 충청북도 단양 사이의 큰 고개로 군사적 요지.
101) 鳥嶺: 경상북도 문경에서 충청북도 연풍에 이르는 고개로 군사적 요지
102) 慶州府尹: 조선조 때 동반(문관)에 속한 외관으로 부의 장관. 종 2품 벼슬로 관찰사와 같은 품계
103) 起復: 복상중(服喪中)에 있는 관리에게 상복을 벗고 나와서 벼슬을 하게 하는 것
104) 平頂巾: 각 관사의 아전들이 머리에 쓰던 건.
105) 參判: 조선조 때 6조(이 ․ 호 ․ 병 ․ 예 ․ 공 ․ 형조)에 소속되었던 종 2품의 관직. 일명 아당(亞堂)이라
고 하는데 판서 다음가는 벼슬
106) 臺諫: 조선조 때 간언을 관장하는 관직으로 사간원과 사헌부를 통틀어 말한다.
107) 體察使: 조선조 때 군관직의 하나. 나라에 전란이 있을 때 임금을 대신하여 지방으로 나가서 군
무를 총찰하는 벼슬. 재상이 겸임하는 것이 상례다.
108) 金汝岉(1548~1592) : 조선조 선조 때의 무관. 자는 사수(士秀), 호는 피구(披裘), 본관은 순천(順
天). 문과에 급제하여 의주목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때 순변사 신립(申砬)의 부장으로 조령 탄금
대 싸움에서 왜적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109) 中樞府: 조선조 때 중앙관청의 하나, 출납 ․ 병기 ․ 군정 ․ 숙위 ․ 경비 ․ 차섭 등의 일을 관장함. 정 2
품의 판사가 그 장관임
110) 單子: 남에게 보내는 물건의 품명 ․ 수량과 보내는 사람의 이름을 적은 종이. 여기에서는 그 명단
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