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의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이현(而見), 호는 서애(西厓), 시호는 문충(文忠)이며 1542년(중종 37) 의성현 사촌리 서림 외가에서 류중영(柳仲郢)의 둘째 아들로 출생 하였다.
선생은 일찍부터 퇴계 선생의 문인으로 들어가 근사록(近思錄)을 전수받았다. 1564년(명종 19) 23세 사마시에 합격하고, 26세가 되던 1566년(명종 2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권지부정자(權知副正字)가 되었다. 이듬해 예문관검열과 춘추관기사관을 겸하였고, 1569년(선조 2)에는 성절사(聖節使)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이어 경연검토관 등을 지내고 수찬에 제수되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이후 교리·응교(應敎) 등을 거쳐 1579년 직제학, 이듬해 부제학을 지내고 상주목사(尙州牧使)를 자원하여 향리의 노모를 봉양하였다. 이어 대사간·도승지·대사헌을 거쳐, 경상도 관찰사로 나갔다. 1584년 예조판서로 경연춘추관동지사(經筵春秋館同知事)를 겸직하였고, 1588년 양관(兩館) 대제학이 되었다.
1590년 우의정에 승진,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으로 풍원부원군(豊原府院君)에 봉해졌다. 이듬해 좌의정에 승진하여 이조판서를 겸하였다.
1591년 선생은 종 6품에 불가했던 정읍현감 이순신(李純信)을 정 3품 전라좌수사로 발탁하고 권율(權慄) 등의 명장을 파격적으로 등용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체찰사(都體察使)로 군무를 총괄하고 이어 영의정이 되어 왕을 호종(扈從)하여 평양에 이르렀는데 나라를 그르쳤다는 반대파의 탄핵을 받고 면직되었으나 의주에 이르러 평안도도체찰사가 되었다. 이듬해 중국 명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과 함께 평양을 수복하고 그 후 충청·경상·전라 3도 도체찰사가 되어 파주까지 진격, 이 해에 다시 영의정이 되어 4도 도체찰사를 겸하여 군사를 총지휘하였다. 화기 제조, 성곽 수축 등 군비 확충에 노력하는 한편, 군대양성을 역설하여 1594년 훈련도감(訓練都監)이 설치되자 제조(提調)가 되어 기효신서(紀效新書)를 강해하였다.
1598년 명나라 경략(經略) 정응태(丁應泰)가 조선이 일본과 연합, 명나라를 공격하려 한다고 본국에 무고한 사건이 일어나자, 이 사건의 진상을 변명하러 가지 않는다는 북인들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 당했다.
1600년에 복관되었으나, 다시 벼슬을 하지 않고 은거했다.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책록되고, 다시 풍원부원군에 봉해졌다.
서애 선생은 도학(道學)·문장(文章)·덕행(德行)·글씨로 이름을 떨쳤고, 특히 영남 유생들의 추앙을 받았다. 저서로는 서애집(西厓集), 징비록(懲毖錄), 신종록(愼終錄), 영모록(永慕錄), 관화록(觀化錄), 운암잡기(雲巖雜記), 난후잡록(亂後雜錄), 상례고증(喪禮考證), 무오당보(戊午黨報), 침경요의(鍼經要義) 등이 있고, 편저로는 대학연의초(大學演義抄), 황화집(皇華集), 구경연의(九經衍義), 문산집(文山集), 정충록, 포은집, 퇴계집, 효경대의(孝經大義), 퇴계선생연보 등이 있다.
저서에 대하여 문인 정경세(鄭經世)가 서애행장(西厓行狀)에서 “평생 지은 시문이 임진병화 때 없어졌으며, 이제 문집 10권과 신종록, 영모록, 징비록 등이 집에 보관되어 있다”라고 한 것을 보면 대부분이 없어졌음을 알 수 있다. 서애집과 징비록(국보 132호)은 임진왜란 史 연구에 있어서 빼놓을 수 없는 귀중한 사료다.
1614년(광해군 6) 병산서원 존덕사(尊德祠)에 제향(祭享) 되었고, 그 후 상주 도남서원, 의성의 빙계서원, 군위의 남계서원, 예천의 삼강서원에 제향(祭享)되었다.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계화(季華)요 호는 수암(修巖)이다.
임진왜란 뒤 아버지에게서 글을 배우고 1610년(광해군 2)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1612년(광해 4) 해서지방에서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이 일어났을 때에 무고를 당하여 5개월간 옥고를 치렀다.
1616년에 유일(遺逸)로 천거되어 세자익위사세마(世子翊衛司洗馬)에 제수되었으나 사양하였다. 1623년(인조 1)인조반정 뒤 다시 학행으로 천거되어 봉화현감이 되었다. 수령으로 있으면서 전묘와 부세(府稅)를 바로잡았다. 이듬해 형조정랑(刑曹正郞)이 되었는데, 오랫동안 해결하지 못한 원옥(冤獄)을 해결하여 판서 이서(李曙)의 경탄을 샀다. 1627년에 청도군수를 지냈으며, 1634년에는 사헌부의 지평(持平)이 되었다.
수암은 서애선생의 셋째 아들이자 문하생으로 가성(家聲)을 찬양한 선비였다.세신(世臣)의 후예답게 깨끗하고 성실하게 생애를 보냈다. 이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대표 저서로는 수암집이 전한다. 1662(현종 3)년 존덕사에 배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