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9. 영남嶺南 여러 성城의 함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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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7 오전 9: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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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수사慶尙左水使박홍朴泓91)은 왜적의 형세가 대단한 것을 보고는 감히 군사
를 내어 싸우지도 못하고 성을 버리고 도망하였다.
왜적은 군사를 나누어 서평포西平浦․ 다대포多大浦를 함락시켰다. 이때 다대포 첨
사 윤흥신尹興信은 적을 막아 힘써 싸우다가 죽음을 당하였다.
경상좌병사慶尙左兵使이각李珏은 이 소식을 듣고 병영兵營으로부터 동래성東萊城92)
으로 들어왔는데, 부산성이 함락되자 이각은 겁을 내어 어찌할 줄 몰라하며, 말로
는 성 밖에 나가 있으면서 적을 견제하려 한다고 핑계하고는 성을 나와서 소산역
蘇山驛으로 물러가서 진을 쳤다. 이때 동래부사東萊府使송상현宋象賢93)은 자기와 함께
여기 머물러 성을 지키자고 말해 보았으나 이각은 그 뜻을 따르지 않았다.
4월 15일에 왜적이 동래로 쳐들어와서 성에 육박하였다. 부사 송상현은 성의
남문으로 올라가서 군사들의 싸움을 독려하였으나 반나절만에 성이 함락되었다.
이때 송상현은 그 자리에 버티고 앉아서 적의 칼날에 맞아 죽었다. 왜적들은 그
가 죽음으로써 성을 지키는 것을 가상하게 여겨, 그 시체를 관棺에 넣어서 성 밖
에 묻고 말뚝을 세우고 그 뜻을 표지하였다.
이렇게 되자 여러 군郡․ 현縣에서는 풍문만 듣고 도망하여 무너져 버렸다.
밀양부사密陽府使박진朴晉94)은 동래성으로부터 급히 달려 돌아오다가 작원鵲院의

좁은 골목을 가로막고 적을 방어하려고 하였다. 이때 적은 양산梁山을 함락시키고
작원鵲院에 이르러 그 길목을 지키는 우리 군사를 보고는 산 뒤로부터 높은 데를
타고서 개미떼처럼 붙어 막 흩어져 내려오니, 좁은 길목을 지키던 군사들은 이것
을 바라보고 다 흩어져 버렸다. 박진은 말을 달려 밀양密陽으로 돌아와서 성안에
불을 질러 군기창고軍器倉庫를 불태우고 성을 버리고 산으로 들어갔다.
이각李珏은 급히 달아나 병영兵營으로 돌아와서 먼저 그 첩을 피난보내니, 성안의
인심이 흉흉하고 군사들도 하룻밤 사이에 너댓번이나 놀랐다. 이각은 새벽을 타서
또한 몸을 빼어 도망하니 모든 군사는 크게 무너져 버리고 말았다.
이때 적은 길을 나누어 휘몰아서 달려들어 잇달아 여러 고을들을 함락시켰으나,
한 사람도 감히 항거하는 자가 없었다.
김해부사金海府使서예원徐禮元95)은 성문을 굳게 닫고 지키고 있었는데, 적들은 성
밖의 보리를 베어서 참호를 메우니 잠깐 동안에 그 높이가 성과 가지런하게 되었
고, 인하여 성을 넘어 달려들었다. 그러자 초계군수草溪郡守96) 이모李某가 먼저 도망
하고, 서예원徐禮元이 뒤를 이어 도망하니 성은 드디어 함락되고 말았다.
순찰사巡察使김수金睟는 처음에 진주성晉州97)에 있다가 왜변의 소식을 듣고 말을
달려 동래성으로 향하다가 중도에 이르러 적병이 이미 가까이 왔다는 말을 듣고,
더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말머리를 돌려 경상우도慶尙右道로 달려왔으나 어떻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다만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 백성들을 타일러 적을 피하
라고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도내는 모두 텅 비어서 더욱 어찌할 방도가 없었다.
용궁현감龍宮縣監우복룡禹伏龍은 그 고을 군사를 거느리고 병영으로 달려가다가
영천永川의 길가에 앉아서 밥을 먹고 있었다. 이때 하양河陽군사 수백명이 방어사
防禦使에 소속되어 상도上道로 향하느라고 그 앞을 지나갔는데, 우복룡은 그 군사들
이 말에서 내리지 않고 지나가는 것을 괘씸하게 여겨 붙잡아서 반란을 하려 한다
고 책망하므로 하양군河陽軍이 병사兵使의 공문을 꺼내어 그에게 보이며 곧 스스로
를 변명하려 하는데, 우복룡이 그 군사들에게 눈짓을 하자, 이를 둘러싸고 막 쳐

죽여서 전멸을 시키니 그 시체가 들판에 가득히 쌓였다.
그런데 순찰사 김수는 이와 같은 행동을 공이 있었다고 임금에게 알려서 우복
룡은 통정대부通政大夫98)가 되고 정희적鄭熙績을 대신하여 안동부사安東府使를 삼았다.
그 뒤에 죽은 하양 군사들의 가족인 고아와 과부들이 사신이 오는 것을 만날
때마다 그 말머리를 가로막고 원통함을 호소하였으나, 우복룡이 이때 명성이 있었
으므로 아무도 그 원통한 사정을 말하여 풀어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91) 朴泓(1534~1593) : 조선조 선조 때의 무관. 자는 청원(淸源), 본관은 울산(蔚山). 명종(明宗) 때 무과에 급
제함. 임진왜란 때 경상좌수사로 있다가 성을 버리고 도망하여 형재소에 이르러 우위대장이 됨
92) 東萊: 경상남도 동남단에 위치한 지명. 지금 부산광역시에 속함
93) 宋象賢(1551~1592) : 조선조 선조 때 문신. 의사(義士). 자는 덕구(德求), 호는 천곡(泉谷), 본관은
여산(礪山). 15세 때 보시, 진사를 거쳐 선조 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정랑 ․ 사재감 ․ 군자감의 정正
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로 왜적을 막아 싸우다가 순사함
94) 朴晉: 조선조 선조 때의 무신. 자는 명보(明甫), 시호는 의열(毅烈). 무과에 급제함. 밀양부사로 있
다가 임진왜란을 당하고, 경상좌병사가 되어 영천 싸움에 공을 세우고,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를

발명하여 왜적을 쳐 경주성을 수복하였다.

95) 徐禮元(?~1593) : 조선조 선조 때 사람. 임진왜란 때 김해부사로 있다가 도주하고, 뒤에 진주목사
가 되어 왜적을 막다가 전사하였음
96) 草溪郡守: 조선조 때 군의 행정을 맡아 다스리는 지방관으로, 종 4품 벼슬
97) 晉州: 경상남도 서남단에 있는 요지

98) 通政大夫: 조선조 때 관계로 정 3품 당상관의 문관. 종친 및 의빈(儀賓)에게 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