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일李鎰이 평양平壤에 이르렀다. 이일은 이미 충주忠州에서 패전한 뒤 강을 건너 강
원도江原道지경까지 이리저리 옮겨 다니다가 이곳(평양) 행재소에 이른 것이다. 이때
여러 장수들이 서울로부터 남하하여 혹은 도망하고 혹은 죽고 하여 한 사람도 임금
을 호종할 사람이 없었는데, 적군이 장차 이를 것이라는 말을 듣고 사람들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일은 무장武將들 중에서 평소 이름이 높았으므로 그가 비록 싸움에
패하여 도망 온 형편이라고 하더라도 사람들은 그가 왔다는 말을 듣고 기뻐하지 않
는 사람이 없었다.
이일은 이미 여러 번 패하여 가시덤불 속에 숨어 있었던 터이므로 평량자平凉
子192)를 쓰고 흰 베적삼을 입고 짚신을 신고 왔는데, 얼굴이 몹시 수척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식을 자아내게 하였다. 나는 그에게 말하기를,
“이곳(평양) 사람들이 장차 그대에게 의지하여 든든하게 여기고 있는데, 이와같
이 메마르고서야 어떻게 여러 사람들을 위로할 수 있겠는지?”
하며 행장을 뒤져 남색 비단 첩리帖裏193)를 찾아 그에게 주었다. 이에 여러 재
신들이 종립騣笠194)도 주고, 혹은 은정자銀頂子와 채색 갓끈도 주어 그 자리에서 바
꿔 입혀 옷차림은 일단 새로 갖추었으나, 다만 가죽신을 벗어 주는 사람이 없었
으므로 그대로 짚신을 신고 있었다. 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비단옷에 짚신은 서로 격이 맞지 않구먼.”
하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 이다 웃었다.
그런데 갑자기 벽동碧潼에 사는 토병土兵임욱경任旭景이 왜적들이 벌써 봉산鳳山에
이르렀다는 정보를 탐지하여 가지고 와서 알리므로, 나는 윤상尹相(좌상左相윤두수
尹斗壽)에게 일러 말하기를,
“왜적의 척후斥候가 틀림없이 벌써 대동강 밖에 와 있을 것이오. 이 강 사이에 있는
영귀루詠歸樓밑은 강물이 두 갈래로 나뉘어서 물이 얕으므로 사람이 건널 수가 있는
데, 만일 왜적들이 우리 백성을 잡아 향도를 만들고 몰래 건너와서 갑자기 달려든다
면 성은 위태로우리다. 어찌 이일을 급히 파견하여 가서 얕은 여울목을 거머잡고, 뜻
밖의 변고를 방비하지 않으리오?”
하니, 윤공尹公도 “그렇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므로, 곧 이일을 파견
하였다. 이때 이일이 거느리고 있는 강원도 군사는 겨우 수십명이었으므로 다른
군사를 더 붙여주게 하였다. 이일은 함구문含毬門에 앉아서 군사를 점고하고 곧 떠
나지 않았다. 나는 사세가 급한 것을 생각하여 사람을 보내 살펴보게 하였더니
그는 그대로 함구문 위에 있었다. 내가 연달아 윤공尹公에게 말하여 이를 독촉하게
하였더니, 이일은 비로소 떠나갔다. 그는 성 밖으로 나가기는 하였으나 길을 가르
쳐 주는 사람이 없어서, 잘못 강서江西쪽으로 향하였는데, 길에서 평양좌수平壤座首
김내윤金乃胤이 밖으로부터 들어오는 것을 만나서 길을 물어 그로 하여금 앞에서
인도하게 하여 만경대萬頃臺아래로 달려가니, 여기는 성으로부터 떨어지기 겨우
10여리쯤 되는 곳이었다.
이일이 강의 남쪽 언덕을 바라보니 적병이 와서 모여 있는 것이 이미 수백명이
라, 강안의 작은 섬에 사는 사람들이 이를 보고 놀라 소리를 지르며 도망하여 흩
어지고 있었다. 이일은 급히 무사武士10여명으로 하여금 섬 안으로 들어가서 활
을 쏘게 하였으나, 군사들이 두려워하여 곧 나아가지 않았다. 이일이 칼을 빼어들
고 그를 베려하자, 그제야 앞으로 나아갔다. 이때 왜적들은 벌써 강물 속에 들어
서 있다가 강 언덕으로 많이 가까이 왔는데, 우리 군사들이 급히 굳센 활을 당겨
이들을 쏘아 연달아 6, 7명을 거꾸러뜨리니, 왜적들은 드디어 물러가 버렸다. 이
일은 그대로 머물러 나루터의 어귀를 지켰다.
192) 平凉子: 패랭이. 천한 사람이나 상중에 있는 사람이 쓰는 모자의 일종
193) 帖裏: 철릭. 깃이 길고 허리에 주름을 잡은 옷으로 곧 무관이 입는 공복(公服)의 하나
194) 騣笠: 말총으로 만든 갓