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원수副元帥신각申恪이 왜적과 양주楊州에서 싸워 적을 파하여 패배시키고 적의
머리 60여 급을 베었는데, 조정에서는 선전관宣傳官184)을 파견하여 즉시 군중軍中에
서 베어 죽였다.
신각申恪이 이보다 먼저 김명원金命元을 따라가서 부원수가 되었는데, 한강漢江싸
움에서 무너졌을 때 신각은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이양원李陽元을 따라 양주楊州로
갔었다. 이때 함경남도병사咸鏡南道兵使이혼李渾의 군사가 마침 도착하였으므로, 신
각이 그 군사를 합해가지고 적군이 서울로부터 나와서 민가로 돌아다니며 재물을
약탈하고 있는 것을 만나서 맞아 쳐부쉈다. 이는 왜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온 뒤
처음으로 그들을 이긴 첫 승리였으므로 사람들은 다 좋아 날뛰었다.
그런데도 김명원金命元은 임진臨津에 있으면서 장계狀啓를 올리면서 “신각은 제 마
음대로 다른 데로 가는 등 호령에 복종하지 않았습니다.”하였다. 우상右相유홍兪泓
은 급히 그를 베어 죽여야 하겠다고 청하여 선전관宣傳官을 이미 떠나보냈는데, 신
각이 적을 쳐부쉈다는 첩보가 이르렀다. 조정에서는 사자를 뒤쫓아 보내 처형을
중지하게 하였으나, 그가 가기 전에 벌써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신각은 비록 무인武人이었으나, 평소에 청렴하고 조심성이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일찍이 연안부사延安府使가 되었을 때, 성을 쌓고 해자[壕]를 파고 군기軍器를 많이 준비
하여 놓았었으므로, 뒤에 이정암李廷馣185)이 연안성延安城을 지켜 성을 보전하였으니,
사람들은 이는 신각申恪의 공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그가 아무런 죄도 없이 죽음을 당하였고 또 그에게 90세가 된 늙은
어머니가 있었으므로, 이 말을 듣는 사람들은 이를 원통하게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조정에서는 지사知事한응인韓應寅을 파견하여 평안도平安道강변江邊의 날랜 군사 3
천명을 거느리고 임진臨津으로 달려가서 왜적을 치게 하고, 김명원의 절제(지휘)를
받지 말게 하였다. 이때 한응인이 명나라 서울에 갔다가 막 돌아왔는데, 윤좌상左
相(윤두수尹斗壽)이 여러 사람에게 말하기를,
“이 사람은 얼굴에 복기福氣가 있으니 반드시 일을 잘 처리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한응인은 드디어 임진강으로 떠났다.
184) 宣傳官: 조선조 때의 관직. 선전관청에 소속된 관원으로, 정 3품에서 종 9품 중에서 임명되었다.
185) 李廷馣(1541~1600) : 조선조 선조 때의 공신. 자는 중훈(仲薰), 호는 사유거사(四留居士) ․ 퇴우당
(退憂堂), 시호는 충목(忠穆), 본관은 경주(慶州).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장령(掌令) ․ 사성(司成) ․
동래부사를 거쳐 임진왜란 때 이조참의로 개성 방위에 공을 세우고, 연안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적을 쳐부숴 공을 세우고 지중추부사가 됨. 뒤에 전라감사 ․ 황해도순찰사 등을 지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