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17. 왜적이 서울에 들어오고 임금은 평양에 도착함

  • 관리자
  • 2021-07-08 오전 9:3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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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3일에 왜적이 서울에 들어오고, 유도장留都將이양원李陽元과 도원수都元帥김

명원金命元은 다 달아나 버렸다.

이보다 먼저 왜적은 동래東萊로부터 세 길로 나누어 올라왔는데, 한 패는 양산梁

山․ 밀양密陽․ 청도淸道․ 대구大丘․ 인동仁同․ 선산善山을 경유하여 상주尙州에 이르러 이

일李鎰의 군사를 패배시켰고, 한 패는 좌도左道(경상좌도慶尙左道)의 장기長鬐․ 기장機張

을 경유하여 좌병영左兵營인 울산蔚山․ 영천永川․ 신녕新寧․ 의흥義興․ 군위軍威․ 비안比安

을 함락시키고, 용궁龍宮․ 하풍진河豊津을 건너 문경聞慶을 나와서 중로中路로 온 군사

와 합세하여 조령鳥嶺을 넘어 충주忠州로 들어오고, 또 충주忠州로부터 두 패로 나누

어 한 패는 여주驪州로 달려가서 강물을 건넌 다음 양근楊根을 경유하여 용진龍津을

건너서 서울[京城]의 동쪽으로 나왔으며, 한 패는 죽산竹山․ 용인龍仁으로 달려가서

한강漢江의 남쪽에 이르렀으며, 또 한 패는 김해金海를 경유하여 성주星州․ 무계현茂

溪縣으로부터 강을 건너고, 지례知禮․ 금산金山을 거쳐 충청도忠淸道영동永同으로 나와

진격하여 청주淸州를 함락시키고 경기京畿로 향하였다. 그런데 그들의 깃발과 창검

은 천리에 서로 뻗치었고, 총소리는 서로 마주쳐 들렸다. 그리고 지나는 곳에는

10리 혹은 5, 60리마다 모두 험한 요지에 의거하여 영책營柵을 설치해서 군사를

머물러두어 지키게 하고, 밤이면 횃불을 들어 서로 신호로 응하였다.

도원수都元帥김명원金命元은 제천정濟川亭에 있다가 적이 오는 것을 바라보고 감히

싸우지 못하고, 군기軍器․ 화포火砲․ 기계機械를 강물 속에 다 집어넣고는 옷을 갈아입

고 도망하였다. 이때 종사관從事官심우정沈友正이 이를 굳게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이양원李陽元은 성城안에 있다가 한강漢江을 지키는 군사가 이미 흩어졌다는 말을

듣고는, 도성(서울)을 지킬 수 없는 것을 알고 역시 성을 버리고 나와 양주楊洲로

달아났다.

강원도조방장江原道助防將원호元豪183)는 이보다 먼저 군사 수백명을 거느리고 여

주驪洲북쪽 강 언덕을 지키며 왜적과 서로 대치하고 있었으므로 적들이 강을 건

너오지 못한 것이 며칠이나 되었었는데, 좀 뒤에 강원도순찰사江原道巡察使류영길柳

永吉이 격문檄文으로 원호를 불러서 강원도로 돌아가니, 적들은 마을의 민가民家와

관사官舍를 헐어서 그 재목을 가져다가 엮어서 긴 뗏목을 만들어 타고 강을 건너

오다가 중류에서 그냥 물에 떠내려가서 죽은 사람도 매우 많았다. 그러나 원호도

이미 가버려서 강 언덕에는 한 사람도 지키는 군사가 없었으므로, 적들은 여러

날에 걸쳐 다 건너왔다.

이에 있어서 왜적의 세 갈래 길로 퍼졌던 군사들은 다 서울로 들어왔다. 그런

데 성안의 백성들은 이미 다 흩어져 나가 버리고 한 사람도 없었다.

김명원은 이미 한강漢江을 빼앗기고, 황해도로 향하려 하여 임진臨津에 이르러 임

금에게 장계를 올려 상황을 말하니 임금께서는, “다시 경기도와 황해도의 군사를

징집하여 임진강을 지키라.”고 명령하였다. 이어 또 “신갈申硈과 함께 임진강을 지

켜 왜적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길을 막으라.”고 명령하였다.

이날 임금께서는 개성開城을 떠나 금교역金郊驛에 행차하였다. 나는 비록 파직을

당한 몸이라 하더라도 감히 뒤떨어질 수가 없어서 임금을 모시고 갔다.

5월 4일에 임금께서는 흥의興義․ 금암金巖․ 평산부平山府를 지나서 보산역寶山驛에 행

차하셨다. 이보다 먼저 개성부開城府를 출발할 때 급히 서두르느라 그만 종묘신주宗

廟神主를 목청전穆淸殿에 놓아두고 왔었다. 이때 종실宗室한 사람이 울부짖으면서

“마땅히 신주神主를 적이 있는 곳에 버려 두어서는 안 됩니다.”하였다.

이에 밤새도록 개성까지 달려가서 신주를 받들고 돌아왔다고 한다.

5월 5일에 임금께서는 안성安城․ 용천龍川․ 검수역劍水驛을 지나서 봉산군鳳山郡에 행

차하셨다. 6일에는 황주黃州에 행차하시고, 7일에는 중화中和를 지나 평양平壤으로

돌아가셨다.

 

 

183) 元豪(1533~1592) : 조선조 선조 때 무신. 자는 중영(仲英), 시호는 충장(忠壯), 본관은 원주(原州).

명종 때 무과에 급제. 경원부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강원도 조방장(助防將)으로 적을 격

파하고, 방어사(防御使)가 되어 김화(金化)에서 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