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16. 임금이 서울을 떠나 피란길에 오름

  • 관리자
  • 2021-07-07 오전 9:14:43
  • 2,378
  • 메일

4월 30일 새벽에 임금께서는 서쪽으로 피란길을 떠나셨다.

신립申砬이 서울을 떠나간 뒤로 서울 사람들은 날마다 승리했다는 보고가 오기

를 기다렸는데, 전날 저녁때 전립氈笠156)을 쓴 사람 셋이 말을 달려 숭인문崇仁門으

로 들어오므로, 성안 사람들은 서로 앞을 다투어 전쟁에 관한 소식을 물으니, 대

답하기를,

“우리들은 곧 순변사巡邊使(신립申砬)의 군관軍官의 노복奴僕인데, 어제 순변사는 충

주忠州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죽고, 여러 군사들은 크게 무너졌는데, 우리들

은 겨우 몸만 빠져나와서 돌아가 집안 사람들에게 알려 피란시키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크게 놀라서 지나는 곳마다 서로 전하여

알려 얼마 안 되는 사이에 온 도성 안이 모두 진동했다.

초저녁에 임금께서는 재상들을 부르셔서 나와 피란할 문제를 의논하셨는데, 임

금께서는 동상東廂157)에 나와 마룻바닥에 앉으시어 촛불을 밝히고, 종실宗室하원군

河源君과 하릉군河陵君등이 모시고 앉았다. 대신大臣들이 아뢰기를,

“사세가 이 지경에 이르렀사오니 상감께서는 잠시 동안 평양平壤에 행하시고 명

나라에 구원병을 청하여 수복을 도모하소서.”

하였다. 장령掌令158) 권협權悏159)이 임금에게 뵙기를 청하고 무릎 밑까지 다가가

서 큰 소리로 호소하기를, “청하옵건대 서울을 굳게 지키소서.”하였는데, 말소리가

몹시 시끄러우므로 내가 이르기를,

“비록 위급하고 어지러운 때라고 하더라도 군신君臣간의 예의가 이같아서는 안

될 것이니, 조금 물러나서 아뢰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더니, 권협은 연달아 부르짖기를,

“좌상左相(류성룡柳成龍)께서도 또한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그렇다면 서울을 버리

는게 옳다는 말씀입니까?”

하였다. 나는 임금에게 아뢰기를,

“권협의 말은 매우 충성스럽지마는, 다만 사세가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겠나이

다.”

하고 인하여 왕자王子를 여러 도道로 파견하여 근왕병勤王兵160)을 부르게 하고, 세

자世子는 임금님의 행차를 따라가도록 하기를 청하여 의논을 결정지었다.

대신들이 합문閤門밖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임금의 분부를 받았는데, 임해군

臨海君은 함경도咸鏡道로 가기로 하여 영부사領府事김귀영金貴榮과 칠계군漆溪君윤탁연

尹卓然이 모시고 따르게 하고, 순화군順和君은 강원도江原道로 가기로 하여 장계군長溪

君황정욱黃廷彧161)과 호군護軍황혁黃赫, 동지同知이기李墍가 모시고 따르게 하였다.

대개 황혁은 딸이 순화부인順和夫人이 되었고, 이기는 원주原州사람이었으므로 아울

러 그들을 보내게 된 것이다.

이때 우상右相은 유도대장留都大將이 되고, 영상領相과 아울러 재신宰臣162) 수십명은

호종扈從163)으로 뽑혀 임금을 모시고 가기로 결정되었으나 나에게는 명하는 것이

없었는데, 정원政院164)에서 아뢰기를, “호종에 류성룡이 없어서는 안되겠습니다.”라

고 하였다. 이어서 나에게도 호종하여 떠나라는 명령이 내렸다.

이때 내의內醫조영선趙英璇과 정원政院의 이속吏屬신덕린申德麟등 10여 명이 큰

소리로 부르짖기를,

“서울을 버려서는 안 됩니다.”

하였다. 조금 뒤에 이일李鎰의 장계가 이르렀다. 그러나 궁중宮中의 위사衛士가 다

흩어져서 경루更漏165) 조차 울리지 못하였다. 이때 횃불을 선전관청宣傳官廳166)에서

얻어가지고 장계를 열어보니 그 내용은, “적이 오늘이나 내일 사이에 꼭 도성都城

으로 들어갈 것 같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장계가 들어간 지 한참 있다가 대가

大駕가 대궐문 밖으로 나왔는데, 삼청三廳167)의 금군禁軍168)들은 다 달아나서

숨어버리고 사람들은 어두움 속에서 서로 맞부딪쳤다. 때마침 우림위羽林衛169)의

지귀수池貴壽가 앞으로 지나갔는데, 내가 그를 알아보고 책망하여 호종하게 하니,

지귀수는 말하기를,

“감히 힘을 다하여 모시지 않겠습니까?”

하고는 그 무리 두 사람도 아울러 불러가지고 왔다.

경복궁景福宮170) 앞을 지나는데 시가의 양쪽 길가에서는 통곡하는 소리가 들려왔

다. 승문원承文院171)의 서원書員이수겸李守謙이 나와 말고삐를 잡고 묻기를,

“승문원 안의 문서文書는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그 중에서 긴요한 것만 수습하여 가지고 뒤따라 쫓아오너라.”하였

더니, 이수겸이 울면서 돌아갔다.

돈의문敦義門172)을 나와서 사현沙峴고개에 이르니 동쪽 하늘이 차츰 밝아왔다.

고개를 돌려 도성 안을 바라보니 남대문南大門173) 안의 큰 창고에 불이 일어나서

연기가 이미 하늘에 치솟았다. 사현을 넘어서 석교石橋에 이르렀을 때 비가 내리기

시작하였다. 이때 경기감사京畿監司권징權徵이 쫓아와서 호종扈從하였다. 벽제관碧蹄

館174)에 이르니 비가 더 심하게 내려 일행이 다 비에 젖었다. 임금께서 역으로 들

어가셨다가 조금 뒤에 나와 떠나셨는데, 여러 관원들이 여기로부터 도성都城으로

돌아가는 사람이 많았으며, 시종侍從대간臺諫들이 가끔 뒤떨어져 오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혜음령惠陰嶺을 지날 때는 비가 물붓듯 쏟아졌다. 궁인宮人들은 약한 말을

타고서 수건으로 얼굴을 가리고 소리를 내어 울면서 따라갔다. 마산역馬山驛을 지

나가는데 한 사람이 밭에서 바라보고 통곡하며 말하기를,

“나라님이 우리를 버리고 가시면 우리들은 누구를 믿고 살랍니까?”

하였다. 임진강臨津江에 이르렀을 때에도 비는 그치지 않았다. 임금께서 배에 오

르신 뒤에 수상首相과 나를 부르시므로 들어가서 뵈었다. 강을 건너고 나니 날은

벌써 저물어 물체의 빛깔도 분별할 수가 없었다. 임진강의 남쪽 기슭에 옛날 승

청丞廳175)이 있었는데 적들이 와서 이 재목을 헐어가지고 뗏목을 만들어 타고 건

널까 염려되므로 이를 태워버리라고 명령하여 불을 지르니, 불빛이 강의 북쪽까지

환하게 비춰 길을 찾아갈 수가 있었다. 초경初更176)에 동파역東坡驛에 이르니 파주

목사坡州牧使허진許晉과 장단부사長湍府使구효연具孝淵이 지대차사원支待差使員177)으로

그곳에 와 있으면서 간략하게 임금에게 올릴 음식을 마련하였는데, 호위하는 사람

들이 종일토록 굶고 온지라 난잡하게 주방으로 달려들어 닥치는 대로 빼내어 먹

어서 장차 임금에게 올릴 음식이 없어지려 하였다. 이를 본 허진과 구효연은 두

려워하여 도망하고 말았다.

5월 1일 아침에 임금께서는 대신들을 불러 보시고, “남쪽 지방의 순찰사巡察使

중에서 근왕勤王할 만한 사람이 없겠는가?”고 물으셨다. 날이 저물어서야 임금께서

개성開城178)으로 향하려 하셨으나, 경기도의 아전과 군사들이 도망하여 흩어져서

호위扈衛할 사람이 없었다. 때마침 황해감사黃海監司조인득趙仁得이 황해도 군사를

거느리고 곧 들어와서 도우려 한다고 했는데, 서흥부사瑞興府使남의南嶷가 먼저 도

착하니, 그 군사가 수백명이고 말 5~60필이었다. 이것으로써 비로소 떠날 수 있

었는데, 떠나려 할 때 사약司鑰179) 최언준崔彦俊이 앞에 나와서 아뢰기를,

“궁중 사람들이 어제도 먹지 않았고 지금도 또 먹지 못하였사오니, 좁쌀을 좀

얻어서 요기를 하게 한 다음에 떠나게 하옵소서.”

하고, 남의가 거느리고 온 군사들이 가지고 있는 양곡에서 쌀 ․ 좁쌀 두서너 말

을 구해서 들여왔다. 오정 때에 초현참招賢站에 이르니, 조인득趙仁得이 와서 뵙는데

장막을 길 가운데 베풀고 영접하였다. 여기서 백관들은 비로소 밥을 얻어먹을 수

있었다. 저녁 때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렀다. 임금께서 문밖의 공서公署에 납시니 대간

臺諫이 글을 번갈아 올려, “수상首相(이산해李山海)이 궁중 측근들과 결탁하여 나라

일을 그르쳤다.”는 죄를 들어 탄핵하였으나, 임금께서는 윤허하시지 않았다.

5월 2일에 대간들이 계속하여 글을 올리므로 수상首相을 파직罷職시키고, 나[柳成

龍]을 승진시켜 수상으로 삼고 최흥원崔興源을 좌상左相으로, 윤두수尹斗壽180)를 우상

右相으로 삼았다. 함경북도병사咸鏡北道兵使신갈申硈이 경질되어 왔다. 이날 낮에 임

금께서 남성문루南城門樓에 나오셔서 백성들을 위로하고 타이르시며 분부하여 각자

마음속에 품고 있는 생각을 말하게 하시었더니 한 사람이 앞으로 나와 엎드렸다.

임금께서,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그는 대답하기를,

“정정승鄭政丞(정철鄭澈)을 불러 주시기를 원합니다.”하였다. 정철鄭澈181)은 이때 강

계江界에 귀양가 있었으므로 그를 불러 정사를 맡기자는 것이었다. 임금께서는 말

씀하시기를,

“알았다.”

고 하시면서 곧 “정철을 소환하여 행재소行在所182)로 오도록 하라.”고 명령하셨다.

임금께서는 저녁에 환궁하셨다. 그리고 나를 죄로 다스려 파면시키고, 유홍兪泓을

우상으로 삼고, 최흥원을 수상으로, 윤두수를 좌상으로 차례에 따라 승진시켰다.

그런데 왜적이 아직도 서울에 이르지 않았다고 들리므로 여러 사람의 의논은

다 임금이 서울을 떠나온 것이 실책이었다고 나무랐다. 그리고는 승지承旨신잡申磼

으로 하여금 서울로 돌아가서 그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156) 氈笠: 벙거지. 군인이나 지체가 낮은 사람들이 쓰는 모자

157) 東廂: 동쪽 바깥채

158) 掌令: 조선조 때 사헌부에 속한 종 4품 벼슬. 정원은 2명

159) 權悏(1542~1618) :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사성(思省), 호는 석당(石塘), 시호는 충정(忠貞),

본관은 안동(安東).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장령(司憲掌令)을 지내고 정유재란 때에는 고급사(告急使)로

명나라에 가서 구원병을 얻어옴. 뒤에 예조판서를 지냄

160) 勤王兵: 임금을 위하여 힘쓴다는 뜻, 근왕군(勤王軍)은 곧 나라를 위하여 힘쓰는 군사를 말함

161) 黃廷彧(1532~1607) :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경문(景門), 호는 지천(芝川), 시호는 문정(文

貞), 본관은 장수(長水). 선조 때 무과에 급제, 호조판서 ․ 동지중추부사를 지냄

162) 宰臣: 정 3품 당상관 이상으로 중앙의 중요 관직에 있는 사람을 통틀어 이름. 재상은 정 1품의

3정승을 말함

163) 扈從: 임금의 뒤를 따라다니며 호위하는 것. 또는 그렇게 하는 사람

164) 政院: 승정원의 다른 이름. 조선조 대 왕명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 후원(喉院) ․ 은대(銀臺) ․ 대

언사(代言司) 등을 불렀음

165) 更漏: 밤에 때를 알리는 것

166) 宣傳官廳: 조선조 대 형명(刑名) ․ 계라(啓螺) ․ 시위(侍衛) ․ 전령(傳令) ․ 부신(符信)의 출납을 맡아보던 관청

167) 三廳: 금군3청(禁軍三廳). 곧 내금위(內禁衛), 우림위(羽林衛) ․ 겸사복(兼司僕)을 말함 

168) 禁軍: 궁궐 안에 호위하는 군대

169) 羽林衛: 금군 3청의 하나. 왕실의 수위, 신변보호를 맡았음

170) 景福宮: 조선조 대의 궁궐. 경복이라는 이름은 􋺷시경􋺸의 ‘君子萬年, 介爾景福’이라는 데에서 따

붙임

171) 承文院: 조선조 때 사대교린에 관한 문서를 맡아보던 기관

172) 敦義門: 서울 서대문의 원명

173) 南大門: 지금 남대문, 원명은 숭례문(崇禮門). 태조 4년(1395)에 성곽 축성과 동시에 기공하여 태

조 7년(1398)에 준공됨. 지금의 것은 세종 때(1447) 개축한 것으로, 서울에 남아 있는 목조건물

중 가장 오래 된 것임

174) 碧蹄館: 경기도 고양읍내에 있는 옛날의 역관. 임진왜란 때의 대전지(大戰地)

175) 丞廳: 나루터를 관리하던 청사

176) 初更: 하룻밤을 5경으로 나눈 첫째 경. 곧 오후 8시경임

177) 支待差使員: 임금의 접대를 위하여 파견된 관리

178) 開城: 경기도에 있는 지명. 고려(高麗)의 고도(古都)

179) 司鑰: 조선조 때 액정서(掖庭署)의 정 6품 잡직

180) 尹斗壽(1533~1601) : 조선조 선조 때 문신. 자는 자앙(子仰), 호는 오음(梧陰), 시호는 문정(文靖),

본관은 해평(海平). 대과에 급제하여 참의 ․ 참판 ․ 관찰사 ․ 형조판서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우

의정을 서순하는 임금을 모셨고, 뒤에 좌의정 ․ 영의정을 지냈음

181) 鄭澈(1536~1593) : 조선조 선조 때의 명신. 자는 계함(季涵), 호는 송강(松江), 시호는 문청(文淸),

본관은 연일(延日). 명종 때 문과에 급제. 벼슬이 우의정에 올랐으나 당파싸움으로 귀양살이를

하다가 임진왜란 때 풀려 활약함. 􋺷송강가사(松江歌辭)􋺸를 남김

182) 行在所: 임금이 대궐 밖에 나가 멀리 거동할 때 일시 머무르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