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의 군사들이 충주忠州에 들어왔다. 신립申砬은 적을 맞아 싸우다가 패하여 죽
고, 여러 군사들은 크게 무너졌다.
신립이 충주에 이르니 충청도忠淸道의 여러 군현郡縣의 군사로서 와서 모여 있는
사람이 8천여 명이나 되었다. 신립은 조령鳥嶺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이일李鎰이 패
하였다는 말을 듣고 간담이 떨어져서 충주로 돌아왔으며, 또 이일 ․ 변기邊璣등을
불러 함께 충주로 오게 하여 험한 곳[鳥嶺]을 버려두고 지키지 아니하고, 호령이
번거롭고 소란스러우므로 보는 사람들은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그런데 그와
친한 군관軍官이 있어 적군이 이미 조령을 넘었다고 비밀히 알려주었는데, 이때는
곧 4월 27일 초저녁이었다. 이 말을 듣자 신립은 갑자기 성 밖으로 뛰어나가므로
군중軍中은 더 소란스러워 졌으며 신립이 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그는 밤
이 깊어서야 가만히 객사客舍로 돌아왔다.
그 다음날 아침에 신립은, “군관軍官이 망녕된 말을 하였다.”고 말하면서 끌어내
어 목을 베어 죽였다. 그리고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왜적들이 아직 상주尙州를 떠나지 않았습니다.”
라고만 하고, 적병이 10리 밖에 있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
인하여 신립은 군사를 거느리고 나와 탄금대彈琴臺153) 앞의 두 강물 사이에 진陣
을 쳤다. 그곳은 왼쪽과 오른쪽에 논이 있고 물풀이 뒤섞여서 말을 달리기가 불
편하였다.
그런데 조금 뒤에 왜적들이 단월역丹月驛으로부터 길을 나누어 쳐들어오는데, 그
기세가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과 같았다. 그 한 패는 산을 따라 동쪽으로 오고, 한
패는 강을 따라 내려오는데, 총소리는 땅을 진동시키고 하늘을 뒤흔들었다.
신립은 어찌할 바를 알지 못하다가 말을 채찍질하여 몸소 적진으로 돌격하려고
시도한 것이 두 차례였으나 들어갈 수가 없었다. 이렇게 되자 그는 말머리를 돌
려 강으로 뛰어들어 물에 빠져 죽었다. 뒤이어 여러 군사들도 다 강으로 뛰어 들
어 그 시체가 강물을 덮어 떠내려갔다. 김여물金汝岉도 또한 어지러운 군사들 속에
서 전사하였다. 이일李鎰은 동쪽의 산골짝으로부터 몸을 빼어 도망하였다.
이보다 먼저 조정에서는 적병이 강성하다는 말을 듣고, 이일이 혼자 힘으로 지
탱하기 어려울 것으로 근심하여, 신립은 당시의 명장이라 군사들이 두려워하여 잘
복종할 것이라고 해서 그로 하여금 많은 군사들을 거느리고 그 뒤를 따라가게 하
여, 두 장수가 서로 힘을 합하여 적을 막을 것을 바랐던 것이니 계교로서는 잘못
된 것이 아니었다.
불행스럽게도 경상도 수륙水陸의 장수들은 다 겁쟁이였다. 그 바다를 감당하던
좌수사左水使박홍朴泓은 한 사람의 군사도 내보내지 않았고, 우수사右水使원균元
均154)은 비록 물길이 좀 멀었다 하더라도 거느리고 있는 배도 많았고 또 적병이
하루에 달려든 것이 아니었으니, 모든 군사를 다 거느리고 앞으로 나아가 위세를
보이면서 서로 버티고 행여 한 번만이라도 이겼더라면, 적들은 마땅히 뒤를 염려
하여 반드시 갑자기 깊이 쳐들어오지는 못하였을 것인데, 우리 군사들은 적을 바
라보기만 하면 곧 멀리 피하여도 한번도 적과 맞싸워 보지도 못하였다. 그리고
적병이 육지로 올라오게 되자, 경상도 좌우병사左右兵使이각李珏․ 조대곤曺大坤은 혹
은 도망하고 혹은 교체되기도 하여 적병이 북을 울리면서 마음대로 행진하여 수
백 리를 사람이 안 사는 지경같이 밟으며, 밤낮으로 북상北上하여도 한곳에서도 감
히 저항을 하여 조금이라도 그 진격하는 기세를 늦추게 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
래서 적은 상륙한 지 10일도 안 되어 이미 상주尙州에 이르렀다. 이일李鎰은 객장客
將의 처지로 거느린 군사도 없었으며 갑자기 적과 싸우게 되었으므로 그 형세가
실로 대적할 수 없는 형편이어서, 신립이 아직 충주에 이르지도 않았을 때 그는
먼저 패하여 진퇴進退의 근거지를 잃어 일이 이렇게 크게 그르치게 되었다.
아아 원통하다! 뒤에 들었지만 왜적이 상주에 들어왔으나, 그래도 험한 곳을 지
나갈 것을 두려워하였다. 문경현聞慶縣의 남쪽 10여리쯤 되는 곳에 옛 성인 고모성
姑母城이 있는데, 여기는 좌 ․ 우도左․ 右道의 경계가 되는 곳으로서, 양쪽 산골짝이
묶어 놓은 듯하고 가운데 큰 냇물이 흐르고 길이 그 아래로 나 있었다. 적병들은
여기 우리 군사가 지키고 있을까 두려워하여 사람을 시켜 두세 번 살펴보게 하여
지키는 군사가 없다는 것을 알고는 곧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면서 지나왔다고 한
다. 그 뒤에 명나라 장수 도독都督이여송李如松155)이 왜적을 추격하여 조령鳥嶺을
지나면서 탄식하기를,
“이와 같이 험한 요새지가 있는 데도 지킬 줄을 알지 못하였으니, 신총병申總兵
(신립申砬)은 실로 모책[謀]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이를 것이다.”
하였다. 대체로 신립은 비록 날쌔어서 그 때 이름을 떨쳤다고 하더라도 전략을
마련하는 데는 그리 장한 바 아니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장수가 군사를 쓸 줄 모르면 그 나라를 적에게 주게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는
데, 지금 비록 이를 뉘우친다고 한들 소용은 없으나, 그래도 가히 뒷날의 경계는
되는 것이므로 자세히 적어두는 것이다.
153) 彈琴臺: 충청북도 충주시의 서쪽에 있는 지명
154) 元均(?~1597) : 조선조 선조 때의 무장(武將)
155) 李如松(?~1598) : 명나라 신종 때의 장군. 임진왜란 때 명의 구원군
4만명을 거느리고 와서 왜적을 치는 일을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