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31. 조호익曺好益의 충의忠義

  • 관리자
  • 2021-07-29 오전 9:32:20
  • 2,187
  • 메일

전前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232) 조호익曺好益233)이 군사를 강동江東에서 모아 왜적을

토벌하였다. 조호익은 창원昌原사람으로 지조와 덕행이 있었는데, 남의 무고를 당

하여 온 가족이 강동으로 이사하였다. 그는 집안이 빈곤하여 생도를 가르쳐서 밥

을 얻어먹은 지가 거의 20년이나 되었어도 그 지조는 더욱 굳건하였다.

임금의 행차가 평양에 이르자 그의 죄를 용서하고 불러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로

임명하였다. 평양성이 왜적에게 포위를 당하자 조호익은 강동江東으로 가서 군사를

모집하여 평양을 구원하려고 하였는데, 조금 뒤에 평양성이 함락되고 군사와 백성

들이 다 무너지자, 조호익은 돌아서 행재소로 갔다. 나는 그를 양책역良策驛에서

만나 그에게 말하기를,

“명나라 구원병에 곧 올 것이니 자네는 의주義州로 가지 말고 강동으로 돌아가

서 그대로 군사를 모집하여 가지고, 명나라 군사와 평양에서 모여서 군세軍勢를 돕

도록 하는 것이 좋겠네.”

하자, 조호익은 그 의견을 따랐다. 나는 드디어 그 사유를 적어 장계狀啓를 올리

고, 군사를 일으키는 공문을 만들어 조호익에게 주고 또 군기軍器를 도와주었다.

조호익은 그길로 가서 군사를 모은 것이 수백 명이나 되었다. 그는 상원祥原에

나와서 진을 치고 왜적을 맞아 많이 베어 죽였다.

조호익은 서생書生으로서 활을 쏘고 말을 달리는 무예에는 익숙하지 못하였으나

다만 충성과 의리로써 군사들의 마음을 격려하였다. 그는 동지날에 그 군사를 거

느리고 멀리 행재소를 바라보고 네 번 절하고는 밤새도록 통곡하니, 모든 군사들

이 다 눈물을 흘렸다.

 

 

232) 義禁府都事: 의금부(義禁府)는 조선조 때의 관청으로 왕명을 받들어 죄수를 추국하는 일을 관장

하였다. 그 관원으로 판사(종1품), 지사(정2품), 동지사(종2품)의 당상관을 합하여 4명을 두어 다

른 관원으로 하여금 겸임시키고, 경력(종4품) ․ 도사(종5품)를 합하여 10명, 그밖에 나장(羅將)

232명을 두었다.

233) 曺好益(1545~1609) :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사우(士友), 호는 지산(芝山), 본관은 창녕(昌

寧). 임진왜란 때 의병을 모집하여 상원에서 왜적을 많이 참획함. 뒤에 안주목사 ․ 성천목사를 지

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