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42. 평양성을 수복修復함

  • 관리자
  • 2021-08-24 오후 12:02:26
  • 1,896
  • 메일

12월에 명나라가 크게 군사를 일으켜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송응창宋應昌1)을 경략

經略으로 삼고,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유황상劉黃裳2), 주사主事원황袁黃3)을 찬획군무贊畫

軍務로 삼아 요동遼東에 주둔하게 하고,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을 대장大將으로 삼아

삼영장三營將인 이여백李如柏4) ․ 장세작張世爵․ 양원楊元과 남방 장수[南將] 낙상지駱尙志․

오유충吳惟忠․ 왕필적王必迪등을 거느리게 하여 압록강을 건너오니, 그 군사의 수효

는 4만여 명이었다.

이보다 먼저 심유경沈惟敬이 돌아간 뒤에 왜적들은 과연 군사를 거두고 움직이지

않았는데, 이미 약속한 50일이 지나도 심유경이 오지 않으니 왜적들은 의심하여

‘세시歲時에는 말을 몰아 압록강鴨綠江에서 물을 먹이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왜적

에게 잡혔다 그 속에서 도망하여 돌아온 사람도 다 “왜적들이 성을 공격할 때 쓰

는 기구를 크게 수리한다.”고 하므로 사람들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12월 초에 심유경이 또 와서 평양성으로 들어가 며칠을 머무르며 다시 서로 약

속을 하고 돌아갔으나, 그러나 말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었다. 그런데 이때에 이

르러 명나라 구원병이 안주安州에 이르러 병영을 성 남쪽에 설치하니, 그 깃발과

기계가 정돈되고 엄숙함이 귀신같았다.

내가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을 만나보고 할 말이 있다고 청하였더니, 제독은 동헌

東軒에 있으면서 들어오라 허락하기에 보니, 곧 키가 크고 품위가 있는 장부다운

사람이었다. 의자를 놓고 마주 않은 다음 내가 소매 속에서 평양성의 지도를 꺼

내 놓고 그 형세와 군사들이 어디로부터 들어가야 할 길을 가리켜 보이니, 제독

은 주의깊게 들은 다음 곧 붉은 붓을 가지고 가리키는 곳마다 점을 찍어 표를 하

였다. 그리고 또 말하기를

“왜적들은 다만 조총鳥銃을 믿고 있을 뿐입니다. 우리는 대포大砲를 사용하는데다

5~6리를 지나가 맞으니 왜적들이 어떻게 당해 내겠습니까?”

하였다. 내가 물러나온 다음 제독은 부채[扇面]에 시詩를 지어 보내왔는데 이르

기를,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옴은 提兵星夜渡江千

삼한의 나라 안이 안정되지 못한 때문 爲說三韓國未安

명주께선 날마다 첩보 오길 기다리고 明主日懸旌範報

이 몸을 밤들어도 술놀음도 그만뒀네 徵臣夜釋酒杯歎

살기를 띠고 왔었지만 마음은 오히려 장해지고 着來殺氣心猶壯

이젠 왜적들도 뼈가 벌써 저리겠네 此去妖氛骨已寒

담소엔들 어찌 감히 승산 아님을 말하리오 談笑敢言非勝算

꿈속에도 말 달리는 싸움터를 생각하오 夢中常憶跨征鞍

라고 하였다. 이때 성안에는 명나라 군사로 가득찼다. 나는 백상루百祥樓에 있었는데, 밤

중에 갑자기 명나라 사람이 군사상의 비밀 약속 세 조목을 가지고 와서 내보였다. 그의

성명을 물었으나 그는 알려 주지 않고 가버렸다.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은 부총병副總兵사대수査大受로 하여금 먼저 순안順安으로 가

서 왜적 놈을 속여 말하기를,

“명나라에서는 이미 강화를 허락하여 심유격沈遊擊(심유경沈惟敬)이 또 왔다.”

라고 하게 하였다. 왜적들은 기뻐하고 현소玄蘇는 시詩를 지어 바쳤는데 말하기

를,

일본이 싸움을 그치고 중화를 굴복시키니 扶桑息戰服中華

사해와 구주가 한 집안이 되었구나 四海九州同一家

기쁜 기운이 갑자기 밖의 눈을 녹여 놓으니 喜氣忽消寰外雪

세상엔 봄이 이른데 태평화가 피었구나 乾坤春早太平花

라고 하였다. 이때는 계사년癸巳年(선조宣祖26년, 1593) 정월正月초하루였다. 왜

적은 그 소장小將평호관平好官으로 하여금 20여명의 왜적을 거느리고 나와서 심유

격沈遊擊을 순안順安에서 맞게 하였다. 사총병査總兵은 그들을 유인하여 함께 술을 마

시다가 복병을 일으켜 그들을 닥치는 대로 몰아쳐서 평호길을 사로잡고 그를 따

라 온 왜적들을 거의 다 베어 죽여 버렸다. 그 중에서 세 사람이 도망하여 달려

가자, 왜적들은 비로소 명나라 군사가 온 것을 알고 크게 소란하여졌다.

이때 명나라 대군이 벌써 숙천肅川에 도착하여 날이 저물었으므로 병영을 마련

하고 밥을 짓고 있었는데, 이 보고가 이르자, 제독提督이 화살을 쏘아 신호를 하고

즉시 몇 사람의 기병을 거느리고 말을 달려 순안順安으로 달려오니, 모든 병영의

군사들이 계속 출발하여 나왔다.

그 다음날 아침에 나아가 평양성을 포위하고 보통문普通門․ 칠성문七星門을 공격

하였다. 왜적은 성 위로 올라가서 붉은 기, 흰 기를 벌여 세우고 막아 싸웠다.

명나라 군사가 대포大砲와 화전火箭으로 이를 공격하니, 대포소리가 땅을 진동시

키고 몇 십리 안의 산악까지 다 움직였으며, 화전이 하늘에 베를 짜는 실오리처

럼 퍼지고 연기가 하늘을 덮고 화살이 성안에 들어가 떨어져 곳곳에서 불이 일

어나 나무들 가지 다 불붙어 버렸다.

낙상지駱尙志․ 오유충吳惟忠등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개미처럼 붙어 성을 기어

올라, 앞 사람이 떨어져도 뒷사람이 올라 물러서는 사람이 없었다. 왜적들이 창칼

을 성첩에 고슴도치 털처럼 드리워 놓았으나 명나라 군사들이 더욱 세차게 싸우

니, 왜적들은 능히 견디어 내지 못하고 물러서 내성內城으로 들어갔는데, 이 싸움

에서 베어 죽이고 불태워 죽인 왜적의 수는 매우 많았다.

명나라 군사는 성안으로 들어가서 내성內城을 공격하니, 왜적들은 성 위에 흙벽

을 만들고 이곳에 많은 구멍을 뚫어 놓았는데 마치 벌집과 같았다. 왜적들은 이

구멍으로부터 총알을 어지럽게 쏘아 명나라 군사가 많이 상하였다. 제독提督은, 궁

한 도둑들은 죽기를 다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군사를 성 밖으로 거두어 그들이 도

망할 길을 열어 놓으니, 그날 밤에 왜적들은 대동강의 얼음을 타고 강을 건너 도

망하여 갔다.

이보다 먼저 내가 안주安州에 있을 때 명나라 대군이 나오려 한다는 말을 듣고,

비밀리 황해도방어사黃海道防禦使이시언李時言․ 김경로金敬老에게 왜적들이 돌아가는

길목에 맞아 치라고 하여 경계하기를,

“양군兩軍(이시언李時言․ 김경로金敬老)이 길가에 복병을 베풀고서 왜적들이 지나갈

때 그 뒤를 짓밟아라. 왜적들은 굶주리고 피곤하게 도망하는 터이므로 싸움할 마

음도 없을 것이니, 다 잡아서 묶을 수 있으리라.”

하였더니 이시언은 즉시 떠나 중화中和에 이르렀으나, 김경로는 다른 일을 핑계

하여 듣지 않았으므로 나는 군관軍官강덕관姜德寬을 파견하여 독촉하게 했더니, 김

경로는 마지못한 듯 역시 중화中和로 나왔으나 왜적이 물러가기 하루 전에 황해도

순찰사黃海道巡察使류영경柳永慶5)의 공문[關]에 따라 되돌아서 재령載寧으로 달아났다.

이때 류영경은 해주海州에 있었는데 자신을 보위하려고 하였고, 그리고 김경로는

왜적과 싸우는 것을 두려워해서 피하여 가버린 것이다.

왜적의 장수 평행장平行長․ 평의지平義智․ 현소玄蘇․ 평조신平調信등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밤을 새워 도망하여 돌아가는데, 기운은 빠지고 발은 부르터 절룩거리면

서 걸어갔으며, 혹은 밭고랑을 기어가기도 하고, 입을 가리키며 밥을 빌어먹기도

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선 한 사람도 나와서 치는 일이 없었고, 명나라 군사도 또한

이를 추격하지 않았으며, 홀로 이시언李時言이 그 뒤를 밟았으나 감히 가까이 다가

서지 못하고, 다만 굶주리고 병들어 뒤떨어진 놈들 60여 명의 목을 베었을 뿐이

었다.

이때 왜적의 장수로서 서울을 머물러 있던 자는 평수가平秀嘉6)였는데, 그는 곧

관백關白(풍신수길豐臣秀吉)의 조카이다. 혹은 그 사위라고도 말하는데, 그는 나이가

어려서 모든 일을 주관할 수 없었으므로, 군사적 사무는 소서행장이 다스리고 있

었다. 그리고 가등청정이 함경도咸鏡道에 있으며 돌아오지 않았으므로, 만약 소서행

장 ․ 의지義智․ 현소玄蘇등을 사로잡았을 것 같으면 서울의 왜적은 저절로 무너졌을

것이다. 그렇게 되면 가등청정[淸正]은 돌아갈 길이 끊어져 버려서 군사들의 마음

이 흉흉하여 두려워하게 되고, 그들이 바닷가를 따라 도망한다 해도 스스로 빠져

나갈 수 없었을 것이고, 한강漢江으로부터 남쪽에 주둔한 왜적들은 차례로 부서져

서 명나라 군사가 북을 울리며 천천히 따라가기만 하여도 바로 부산釜山까지 이르

러 싫도록 술을 마셨을 것이고, 잠깐 동안에 온 나라 강산 안의 왜적이 숙청되었

으리니, 어찌 몇 해 동안을 두고 어지럽게 싸웠을 리 있으리오? 한 사람[金敬老]의

잘못한 일이 온 천하에 관계되었으니, 실로 통분하고 애석한 일이다.

나는 장계狀啓를 올려 김경로金敬老를 목 베자고 청하였다. 이는 대개 내가 평안

도체찰사平安道體察使로 되어 있어서 김경로는 나의 관할 밑이 아니었으므로 먼저

이를 청한 것이다. 조정에서는 선전관宣傳官이순일李純一을 파견하여 표신標信을 가

지고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러 그를 죽이려 하다가, 먼저 제독提督에게 알렸더니 제독

은 말하기를,

“그의 죄는 마땅히 죽여야 하겠으나, 그러나 왜적이 아직 섬멸되지 않았으므로

한 사람의 무사라도 죽이기는 아까우니, 우선 백의종군白衣從軍7)하여 그로 하여금

공을 세워 그 죄를 벗도록 함이 옳을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공문을 만들어 이순일을 주어 돌려보냈다.

 

 

1) 宋應昌(?~?) : 명나라 신종(神宗) 때의 병부우시랑(兵部右侍郞), 임진왜란 때 경략(經略)으로 요동에

주둔하였다.

2) 劉黃裳(?~?) : 명나라 신종 때의 병부원외랑(兵部員外郞),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병의 군무를 찬획

(贊畫)함

3) 袁黃: 명나라 신종 때의 병부주사(兵部主事), 임진왜란 때 명나라 구원병의 군무를 찬획함

4) 李如柏(?~?) : 명나라 신종 때의 무장. 임진왜란 때 삼영장(三營將)의 한 사람으로 출전함. 곧 제독

(提督) 이여송(李如松)의 아우

5) 柳永慶(1550~1608) :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선여(善餘), 호는 춘호(春湖), 본관은 전주(全州).

임진왜란 때 초유어사(招諭御史)가 되어 군사를 모집하는 데 공이 컸다.

6) 平秀嘉: 왜적의 장수. 곧 위희다수가(宇喜多秀家). 풍신수길의 양자

7) 白衣從軍: 죄인의 몸으로 종군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