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35. 경기감사京畿監司 심대沈岱의 죽음

  • 관리자
  • 2021-08-05 오전 9:34: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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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감사京畿感司심대沈岱242)가 왜적에게 습격을 당하여 삭녕朔寧243)에서 사망하였다.

심대는 사람됨이 강개慷慨하여 왜적의 변고가 일어난 뒤로부터 항상 분함을 참지 못하였으며,

나라의 사명을 받들고 싸움터로 출입할 때에도 위험한 것도 피하지 아니하였다.

이해(1592) 가을에 심대는 권징勸徵을 대신하여 경기감사京畿監司가 되어 행조行朝244)로부터

임소任所로 떠나가는데, 길이 안주安州로 나오게 되므로 나를 백상루白

祥樓에서 찾아보았다. 그는 국난國難을 말하면서 분개하고 있는데, 그 뜻을 살펴보

니 강직하여 친히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왜적과 싸우려 하므로, 나는 그를 경계하여말하기를

“옛날 사람이 말하지 않았는가? ‘밭을 가는 일은 마땅히 종[農奴]에게 물으라’고.

그대는 서생書生이므로 싸움터에 임하는 일은 결국 능숙하지 못할 것일세 그곳[京

畿道]에 양주목사楊州牧使고언백高彦伯이라는 사람이 있는데 용맹스러워 잘 싸울 것

이니, 그대는 다만 군병을 수습하여 주어 고언백으로 하여금 이를 거느리게만 한

다면 가히 공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니, 스스로 삼가 군사를 거느리고 덤비지 말도록 하게.”

하니, 심대는 “예, 예”하고 대답하였지만, 속으로는 매우 마땅하지 않은 눈치였다.

나는 또 그가 외롭게 떠나 왜적이 있는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군관으로

서 활을 잘 쏘는 의주義州사람 장모張某를 보내어 그와 함께 가게 하였다.

심대가 떠나간 지 몇 달 동안 늘 경기도 사람으로 행재소에 아뢸 일이 있어 갈

때 안주安州를 지나는 사람이 있으면 아닌게 아니라 그는 꼭 편지로 나에게 안부를 물었다.

나도 꼭 친히 그 사람에게 경기도의 왜적의 형세와 감사(심대)가 어떻게 하고 있는지를 물었다.

그는 대답하기를,

“경기도[畿甸]는 왜적의 잔학한 피해가 다른 도보다도 심합니다. 왜적들은 날마

다 나와서 불지르고 약탈을 하여 성한 곳이라고는 없는 형편입니다. 전에는 감사

와 수령 이하의 관원들은 모두 다 깊은 벽지에 몸을 피하고 그를 따라다니는 사

람들도 평복을 입고 몰래 다니고 혹은 여기저기로 자주 옮겨 그 있는 곳을 정하

지 않아서 왜적들의 환난을 막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감사(심대)께서는 그와는 달

리 왜적을 두려워하지 않으시고 늘 순행巡行하실 때마다 먼저 공문을 보내 알리기

를 평일처럼 하시고 깃발을 세우고 나팔을 불며 다니십니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몹시 근심하여 거듭 글을 써 보내어 전에 말한 것

같이 조심하라고 당부하였으나, 심대는 그 태도를 변경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군

사를 모아 모두 스스로 거느리고 “서울을 회복하련다.”라고 소리쳐 소문을 퍼뜨리고,

날마다 사람을 보내 성 안으로 들어가서 군사를 불러 모아 안에서 호응하라고 약속하니,

사람들은 난리가 진정된 뒤에 왜적에게 붙었다는 것을 죄받을까 두려워하여

연명連名하여 글을 써 가지고 나와 감사에게 가서 스스로 성안에서 내응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말하니 이런 사람이 날로 천백명을 헤아렸다. 그들은 이름하기를

‘약속을 받은패[聽約束]’니 ‘군기를 옮기는 패[軍器]’니,

‘적정을 알리는 패[報賊情]’니 하여 사람마다 왕래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그러니 그 중에는 또한왜적의 앞잡이가 되어 우리의 동정을 살펴 가는 사람도 많았다.

이처럼 나고 들고 서로 뒤섞여 날쳤으나 그러나 심대는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이때에 이르러 심대는 삭녕군朔寧郡에 있었는데, 왜적들은 이것을 탐정하여 알고

는 몰래 대탄大灘을 건너와서 밤에 습격하였다. 심대는 놀라 일어나서 옷을 입고

달아나니 왜적들이 쫓아와서 그를 죽였다. 군관軍官장모張某도 역시 함께 죽음을당하였다.

왜적들이 물러간 뒤에 경기도 사람들은 그 시체를 거두어 임시로 삭녕군 안에 장사지냈다.

며칠 뒤에 왜적이 다시 나와서 그 머리를 베어 가져다가 서울의 종루鐘樓거리

위에 매달았는데 5~60일이 지나도 그 얼굴빛이 산 사람과 같았다.

기도 사람들은 그 충의忠義를 애석하게 여겨 서로 재물을 모아 가지고 파수보는

왜적에게 뇌물을 주고 그 머리를 찾아 내어 함에 넣어 강화도로 보냈다가, 왜적

이 물러간 뒤에 그 시체와 함께 고향 산으로 환송하여 장사지냈다.

심대는 청송靑松사람으로 그의 자는 공망公望이다. 그 아들 대복大復은 조정에서

심대를 대신하여 벼슬을 주어 현감縣監에 이르렀다.

 

 

242) 沈岱(1546~1592) :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공망(公望), 호는 서돈(西敦), 시호는 충장(忠壯),

본관은 청송(靑松), 문과에 급제하여 임진왜란 때 경기감사로 서울 수복을 꾀하다가 왜적에게 죽

음을 당함

243) 朔寧: 지금 경기도 연천(連川)의 옛 이름

244) 行朝: 임금이 임시 거처하는 행재소의 다른 이름. 행궁이라고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