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34. 명나라 심유경沈惟敬의 강화회담講和會談

  • 관리자
  • 2021-08-04 오전 11:4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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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명나라 유격장[遊擊] 심유경沈惟敬이 왔다.

이보다 먼저 조승훈祖承訓이 이미 패전하고 돌아가, 왜적들은 더욱 교만하여져서

글을 우리 군사들에게 보내었는데 ‘염소 떼가 한 호랑이를 친다’는 말이 있었다.

염소는 명나라 군사를 비유함이고, 호랑이는 자기를 자랑함이었다. 왜적들은 가까

운 시일에 서쪽 방면으로 내려간다고 떠들므로 의주義州사람들은 다 피란할 짐을

지고 서 있는 형편이었다.

심유경은 원래 절강성 백성이었는데, 석상서石尙書(석리石理)는 평소 그가 왜국의

실정을 다 안다고 하여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이름을 빌어 내보냈던 것이다. 그는 순

안順安에 이르러 급히 글을 왜적의 장수에게 보내어 성지聖旨239)로써 “조선朝鮮이 무

슨 잘못을 일본에 저지른 일이 있는가? 일본은 어찌하여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켰

느냐?”하고 문책하였다.

이때 왜적의 변고가 갑자기 일어나고, 또 그 잔인하고 혹독함을 사람마다 두려

워하여 감히 그들의 병영을 엿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심유경은 노란 보자기에 편

지를 싸서 부하 한 사람을 시켜 등에 지고 말을 달려 가게 하여 보통문普通門으로

부터 성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왜적의 장수 소서행장은 그 편지를 보고 즉시

“직접 만나서 일을 의논하자.”고 회답하여 왔다. 심유경이 곧 가려고 하자 사람들

은 다 위태로운 일이라 하여 그만두라고 권하는 이가 많았다. 심유경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들이 어찌 능히 나를 해칠 수 있으랴.”

하고 3~4명의 부하를 데리고 평양성으로 갔다. 소서행장 ․ 평의지平義智․ 현소玄蘇

등은 군대의 위세를 성대히 베풀고 나와서 평양성 북쪽 십리 밖의 강복산降福山밑

에 모였다.

우리 군사들은 대흥산大興山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광경을 바라보니, 왜적의 군

사는 매우 많고 창칼이 눈빛처럼 번득였다. 심유경이 말을 내려 왜적의 진중으로

들어가니 왜적들이 떼를 지어 사면에 둘러서므로 붙잡히게 되는가 의심하였다. 날

이 저물어 심유경이 돌아왔는데, 왜적들은 그를 전송하는 예가 매우 공손하였다.

그 다음날 소서행장은 글을 보내 안부를 묻고, 말하기를,

“대인大人(심유경沈惟敬)께서는 시퍼런 칼날 속에서도 낯빛이 하나 변하지 않으시

니 비록 일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심유경은 이에 대답하기를,

“너희들은 당나라 때 곽영공郭令公240)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그는

혼자서 회흘回紇241)의 만군萬軍속으로 들어가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난

들 어찌 너희를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인하여 왜적과 약속하여 말하기를,

“내 돌아가서 우리 황제[神宗]에게 보고하면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니, 50일을

기한으로 하여 왜군은 평양성 북쪽 십리 밖으로 나와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없도

록 하고, 조선朝鮮군사도 그 십리 안으로 들어가서 그와 싸우지 말도록 할 것이

다.”

라고 했다. 그리고는 곧 그곳 경계에 나무를 세워 금표禁標를 만들어 놓고 갔으

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239) 聖旨: 명나라 신종(神宗)의 교지(敎旨)

240) 郭令公: 당나라 명장 곽자의(郭子儀)를 말함. 그는 현종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리를 평정하고,

회흘(回紇)의 후범(後犯)을 막는 등 많은 공을 세움

241) 回紇: 중국 동북쪽에 있는 부족, 본래는 흉노족의 후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