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나라 조정에서는 병부시랑兵部侍郞형개邢玠57)를 총독군문總督軍門으로, 요동포정
사遼東布政司양호楊鎬58)를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마귀麻貴59)를 대장大將으로 삼고,
양원楊元․ 유정劉綎․ 동일원董一元등이 서로 잇달아 우리나라로 나왔다.
정유년丁酉年(선조宣祖30년, 1597) 5월에 양원楊元이 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먼
저 왔는데, 그는 서울에 며칠 동안 머무르다가 전라도全羅道로 내려가 남원南原에
주둔하여 지켰다. 대개 남원은 호남[湖] ․ 영남[嶺]의 요충이 되는 곳으로 성城도 자
못 견고하고 완전하였는데, 이는 지난날에 낙상지駱尙志가 또 성을 증축하여 지킬
만하게 만든 까닭이었다.
이 남원성 밖에는 교룡산성蛟龍山城이 있는데, 여러 사람들의 의논은 산성山城을
지키려고 하였으나, 양원은 본성本城을 지켜야 된다고 하면서 성 위에 담을 더 쌓
고 호를 팠으며, 호 안에 또 양마장羊馬牆60)을 베풀었는데, 밤낮으로 일을 돌려 하
여 한 달이 넘어 겨우 완성되었다.
57) 邢玠: 명나라 장수.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있다가 정유재란 때 총독군문(總督軍門)으로 우리나라
에 와서 활약함
58) 楊鎬: 명나라 장수. 정유재란 때 경리조선군무(經理朝鮮軍務)로 구원병을 거느리고 왔으나, 울산성
공격에 실패하여 파면됨
59) 麻貴: 명나라 장수로 정유재란 때 제독(提督)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잘 싸워 양장(良將)이라 이름
60) 羊馬牆: 밖의 호(壕)인데, 작은 성을 쌓고 그 위에 다시 여장(女牆: 성 위에 쌓은 담)의 담을 세운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