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47. 심유경의 적극 강화책講和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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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31 오전 9:4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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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격장[遊擊] 심유경沈惟敬이 다시 서울로 들어가서 왜적들에게 군사를 물러가게

하라고 달래었다.

4월 7일에는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이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平壤으로부터 개성開城

으로 돌아왔다.

이보다 먼저 김천일金千鎰의 진중에 이진충李藎忠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스스로

청하여 서울로 들어가서 왜적들의 적세를 탐지하고, 두 왕자[臨海君․ 順和君]와 장

계군長溪君황정욱黃廷彧을 만나보고 돌아와서 말하기를,

“왜적들이 강화講和할 뜻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하였다. 얼마 안 되어 왜적이 서한을 용산龍山의 우리 수군에게 보내어 화친하기

를 청하므로, 김천일은 그 서한을 나에게 보내왔다. 나는 ‘제독(이여송)이 이미 싸

울 의사가 없으니, 혹은 이(강화)를 빌어 왜적을 물리치려 한다면 다시 개성開城으

로 돌아오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니, 그러면 거의 일을 끝낼 것이다.’라고 생각하였

다. 그 글을 사대수査大受에게 보였더니, 그는 곧 가정家丁이경李慶으로 하여 빨리

평양平壤으로 달려가 알리게 하였다. 이에 있어서 제독 이여송은 또 심유경을 오게

한 것이다.

김명원金命元은 심유경을 보고 말하기를,

“왜적들이 평양平壤에서 속임을 당한 것을 분하게 여겨 반드시 좋지 않은 생각

을 가졌을 것인데, 어찌 다시 적진으로 들어갈 수 있겠습니까?”

하니, 심유경은 말하기를,

“적들이 스스로 빨리 물러가지 않았던 까닭으로 패하였는데, 나에게 무슨 상관

이 있단 말이오?”

하면서 적진으로 들어갔다. 그가 왜적의 진중으로 들어가 있으며 말한 것은 비

록 듣지는 않았지만 대개는 ‘왕자王子와 배신陪臣을 돌려보내라고 꾸짖고, 군사를

거느리고 부산釜山으로 돌아간 연후에야 강화하는 것을 허락한다.’는 것이었으리라.

왜적이 약속을 받들겠다고 청하여 제독 이여송은 드디어 개성開城으로 돌아왔다.

나는 제독 이여송에게 정문呈文24)을 보내어 “화호和好하는 것이 좋은 계획이 아

니고, 이를 치는 것만 같지 못할 것이다.”라고 극진하게 말하였다. 그랬더니 제독

이여송은 회답하여 말하기를,

“우선 내 마음도 그렇게 생각되는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도 그 의견을 들어 쓸 의사는 없었던 것이다. 그는 유격장군遊擊將軍

주홍모周弘謨로 하여금 왜적의 진영으로 가게 하였다. 나는 김원수金元帥와 함께 마

침 권율權慄의 진중에 있다가 그를 파주坡州에서 만났다. 주홍모는 우리들에게 들어

와서 기패旗牌25)에 참배하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이것은 곧 왜적의 진영으로 들어갈 기패旗牌인데 내가 무엇 때문에 여기 참배

한다는 말이오? 또 송시랑宋侍郞이 왜적을 죽이지 말라는 패문牌文도 있으니 더욱

받을 수가 없습니다.”

하였다 주홍모는 이를 세 번 네 번 강요하였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고 말을 타

고 동파東坡로 돌아갔다. 주홍모가 사람을 시켜 제독 이여송에게 이런 일을 말하게

하니, 제독(이여송)은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기패旗牌는 곧 황제의 명령이므로 비록 오랑캐들이라도 보면 문득 절을 하는데,

어찌하여 절하지 않는다는 말인가? 내 군법으로 처리한 연후에 회군하리라.”

하였다. 접반사接伴使이덕형李德馨이 이런 점을 나에게 알리며 말하기를,

“내일 아침에 와서 사과하지 않으면 안 되겠습니다.”

하므로, 다음날 나는 김원수金元帥와 함께 개성開城으로 가서 영문[門]을 찾아 이

름[名]을 통하였더니, 제독(이여송)은 노하여 만나 주지 않았다. 김원수는 물러가

려 하였으나 나는 말하기를,

“제독(이여송)이 우리를 시험하는 것이리니 조금만 기다려 봅시다.”

하였다. 이때 비가 조금 왔다. 우리 두 사람이 팔짱을 끼고 문 밖에서 있으려니

까, 조금 뒤에 제독(이여송)이 보낸 사람이 문을 나와 우리를 엿보고 들어갔다 다

시 나왔다 하기를 두 번 되풀이 하더니 조금 있다가 들어오라고 하여 안으로 들

어가니 제독은 마루 위에 있었다. 내가 그 앞으로 나가서 예를 표하고 사과하기

를,

“우리들이 비록 어리석고 용렬하다 하더라도 어찌 기패旗牌를 공경할 줄 알지

못하겠습니까? 다만 기패의 곁에 패문牌文이 있었는데, 우리나라 사람에게 왜적을

죽이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으므로, 사사로운 마음이었으나 그윽이 이를 통분하게

여겨 감히 참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죄를 벗어날 수는 없겠습니다.”

하니, 제독(이여송)은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지으면서 곧 말하기를,

“그 말은 아주 옳은 말씀입니다. 그런데 패문牌文은 송시랑宋侍郞(송응창宋應昌)의

명령이니 나에게는 관계가 없는 얼입니다.”

하고는 말하기를,

“요사이에는 근거없는 소문[流言]이 많습니다. 송시랑이 만약 배신陪臣이 기패旗牌

에 참배하지 않았는데 내가 이를 용서하고 문책하지 않았다는 말을 들으면 반드

시 아울러 나까지도 책망을 당할 것이니, 모름지기 정문呈文을 만들어 대략 그 사

정을 변명하여 보내오도록 하시오. 만약 송시랑이 문책하는 일이 있으면 나는 그

것으로써 해명할 것이고, 묻지 않으면 이 문제를 그대로 놓아두리다.”

하였다. 우리들 두 사람은 인사하고 물러나와서 그 말대로 정문呈文을 만들어 보

냈다.

이로부터 제독(이여송)은 사람을 파견하여 왜적의 진영을 왕래하는 일이 잇달았

다. 하루는 내가 원수[金命元]와 함께 가서 제독(이여송)의 동정을 엿보고 동파東坡

로 돌아오다가 천수정天壽亭앞에 이르렀는데, 사장군[査將(사대수査大受)]의 가정家

丁26) 이경李慶을 만났다. 그는 동파로부터 개성開城으로 들어가는 길이었는데, 말

위에서 서로 읍揖하고 지나쳤다. 초현리招賢里에 이르렀을 때 명나라 사람 셋이 말

을 타고 내 뒤로부터 달려와서 큰 소리로 “체찰사體察使가 어디 계시오?”하고 물으

므로 내가 말하기를,

“내가 바로 체찰사다.”

하였더니 그들은 “말을 돌이키라.”고 호통을 쳤다. 그 중 한 사람이 손에 쇠사슬

을 들고 긴 채찍으로 내가 탄 말을 막 후려갈기며 큰 소리로,

“달려라, 달려라.”

하며 길을 재촉하였다. 나는 무슨 일인지를 알지 못하고 다만 그 뜻에 맡겨 개

성으로 달리는데, 그 사람은 말 뒤에서 말을 채찍질하는 것을 그치지 않았다. 그

래서 나를 수행하는 사람들은 다 뒤에 떨어지고, 오직 군관軍官김제金霽와 종사관

신경진辛慶晉만이 힘을 다하여 뒤쫓아 따라왔다. 청교역靑郊驛을 지나 장차 토성土城

모퉁이에 이르렀을 때, 또 한 사람의 기병이 성안으로부터 말을 달려 와서 세 사

람의 기병에게 무슨 말인지 수군거렸다. 이에 이르러 세 사람의 기병은 나에게

읍하면서,

“돌아가셔도 좋습니다.”

라고 하였다. 나는 멍하니 무슨 까닭인지 헤아리지 못하고 돌아섰는데, 그 다음

날 이덕형李德馨이 통지한 것으로 인하여 비로소 그 까닭을 알게 되었다. 이는 곧

제독 이여송의 신임하는 가정家丁한 사람이 밖에 나갔다가 들어와서 제독(이여송)

에게 이르기를,

“류체찰柳體察(류성룡柳成龍)이 강화講和를 하지 않으려고 임진강의 배들을 모두 없

애 버려, 강화를 위한 사자들이 왜적의 진영으로 드나들지 못하게 만듭니다.”

라고 하였다. 제독(이여송)은 갑자기 성을 내며 나를 잡아다가 곤장 40대를 치

려고 하였다는 것인데, 내가 아직 거기에 이르지 않았을 때에 제독(이여송)은 눈

을 부릅뜨고 팔을 걷으며 혹은 앉았다 혹은 일어났다 하므로 좌우에 있던 사람들

은 다 무서워 떨었다. 그 얼마 있다가 이경李慶이 이르렀는데, 제독(이여송)은 그

에게 임진강에 배가 있는지 없는지를 물으므로, 이경이 말하기를,

“배가 있어서 왕래하는데 아무런 지장이 없었습니다.”

하니, 이여송은 곧 사람을 시켜 나를 데리고 가는 사람을 그만두게 하고, 가정

家丁이 거짓말을 하였다고 말하면서 그에게 수백대나 심한 매를 쳐서 숨이 끊어진

뒤에야 끌어내었다는 것이다. 그는 나에게 노여워한 것을 뉘우쳐 사람들에게 이르

기를,

“만약 체찰사(류성룡)가 온다면 내 어떻게 대처하랴?”

하였다. 이는 대개 제독 이여송이 늘 내가 화의和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하여

평소부터 불평스러운 마음을 가졌던 까닭으로, 남의 말을 듣자마자 다시 살펴볼

사이도 없이 갑자기 이 같이 성을 내었다. 이때 사람들은 다 나를 위험하다고 생

각하였다는 것이다.

며칠이 지난 뒤에 제독 이여송은 또 유격遊擊척금戚金․ 전세정錢世禎두 사람으로

하여금 기패旗牌를 가지고 동파東坡에 이르러 나와 김원수[金命元]와 관찰사觀察使이

덕형李德馨을 불러 함께 앉아서 조용히 말하기를,

“적이 두 분 왕자와 배신陪臣을 돌려보내고 서울에서 물러나 돌아가기를 청하니,

곧 그들의 청하는 바에 따라 속여 성을 나오게 한 뒤에 계책을 써서 추격합시다.”

하였는데, 이는 곧 제독 이여송이 그들을 시켜 와서 좋아하는지 싫어하는지 내

뜻을 탐색하게 한 것이었다. 나는 오히려 그 전의 논의를 고집하여 서로 오가기

를 마지않았다. 전세정은 성질이 조급하여 성을 내며 큰 소리로 말하기를,

“그렇다면 그대들 국왕은 어찌하여 도성을 버리고 도피하였는가?”

하였다. 나는 천천히 말하기를,

“임시로 국도(서울)를 옮겨 회복을 도모하는 것도 역시 한 가지 방도라고 할 것

이다.”

하였다. 이때 척금戚金은 다만 나를 자주 살펴보며 전세정과 미소를 지을 뿐 말

이 없었다. 전세정 등은 드디어 돌아갔다.

4월 19일에 제독 이여송이 대군을 거느리고 동파東坡에 이르러 사총병査總兵(사대

수査大受)의 막사에 유숙하였다. 이는 대개 왜적이 벌써 퇴병退兵할 것을 약속하였

으므로 장차 서울로 들어가려는 것이었다. 나는 제독 이여송의 숙소를 찾아가서

안부를 물었으나 그는 만나 주지 않고 통역관에게 일러 말하기를,

“체찰사體察使(류성룡柳成龍)는 나에게 불쾌한 생각을 갖고 있을 터인데 또 찾아와

서 문안합니까?”

라고 할 뿐이었다.

 

 

24) 呈文: 공문의 한 형식. 하급 기관이 상급 기관에게, 또는 아래 관원이 위 관원에게 진정할 때 쓰

는 공문

25) 旗牌: 임금의 명령을 적은 깃발

26) 家丁: 집에서 신임하고 부리는 복역(僕役)들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