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46. 굶주리는 백성들을 구제함

  • 관리자
  • 2021-08-29 오전 9:48:54
  • 1,809
  • 메일

군량의 나머지 곡식을 내주어 굶주린 백성들을 구제하자고 임금에게 청하였더니

이를 허락하셨다.

이때 왜적은 서울을 점거한 지 이미 2년이나 되었으므로 병화로 인한 피해 때문

에 천리 지방이 쓸쓸하였고, 백성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서 굶어 죽고 거의 다

없어지는 상태였다. 성 안에 남아 있던 사람들은 내가 동파東坡에 있다는 말을 듣고

서로 붙들고 이고 지고서 온 사람들이 그 수를 헤아릴 수가 없었다. 사총병査總兵(사

대수査大受)이 마산馬山으로 가는 길에서, 어린아이가 기면서 죽은 어머니의 젖을 빨

고 있는것을 보고 가엾게 여겨 이를 데려다가 군중에서 기르면서 나에게 일러 말하

기를

“왜적들이 아직 물러가지도 않았는데 백성들이 이와 같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

니까?”

하면서 이어 탄식하기를,

“하늘도 탄식하고 땅도 슬퍼할 일이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이 흘렀다.

이때 대병大兵이 곧 다시 온다고 하므로, 군량을 실은 배가 남쪽으로부터 오는 것

을 다 강언덕에 벌여 대놓게 하고, 감히 달리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다. 때마침 전

라도소모관全羅道召募官19) 안민학安敏學20)이 겉곡식 1천 석石을 모아가지고 배에 싣고

왔다. 나는 매우 기뻐하며 곧 임금에게 장계를 올려 이것을 가지고 굶주린 백성들

을 구제하자고 청하고, 전 군수前郡守남궁제南宮悌를 감진관監賑官으로 삼아 솔잎을 따

다가 가루를 만들어서 솔잎가루 열 푼중[十分]에 쌀가루 한 홉[一合]씩을 섞어 물에

타서 마시게 하였는데, 사람은 많고 곡식은 적어서 살려낸 것이 얼마 안 되었다.

이를 본 명나라 장수들 역시 이를 불쌍히 여겨 자기네들이 먹을 군량 30석을 나누

어 내어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으나, 이는 능히 백분의 일에 미치지 못하였다. 하

루는 밤에 큰 비가 왔는데, 굶주린 백성들이 내가 있는 곳의 좌우에 와서 신음하고

있어 차마 들을 수가 없었다. 아침에 일어나 살펴보니 여기저기 흩어져 죽은 사람

이 매우 많았다.

경상우감사慶尙右監司김성일金誠一도 역시 전 전적前典籍이노李魯를 파견하여 급박한

사정을 나에게 알리며 말하기를,

“전라좌도全羅左道의 곡식을 꾸어 내어 굶주린 백성을 구제하고, 또 그 곡식으로

봄 밭갈이 종자로 하려고 하나 전라도사全羅道事최철견崔鐵堅이 빌려주는 것을 좋아

하지 않습니다.”

하였다. 이때 지사知事김찬金瓚21)이 체찰부사體察副使가 되어 호서湖西22)에 있었으므

로, 나는 즉시 공문을 김찬에게 보내 전라도로 달려 내려가서 몸소 남원南原등지의

창고를 열어 1만 석을 영남嶺南23)으로 옮겨 백성들을 구제하게 하였다.

대저 이때는 서울부터 남쪽 해변에 이르기까지 왜적의 군사들이 가로질러 꿰뚫

고 있었고, 때는 바야흐로 4월인데 백성들은 다 산에 오르고 골짜기에 들어가 있

었으므로 하나도 보리를 심는 곳이 없었으니, 왜적들이 다시 몇 달 동안 더 물러

가지 않았더라면 우리 백성들은 다 굶어 죽었을 것이다.

 

 

19) 召募官: 전시에 군량 ․ 마필 ․ 정병 등을 모집하는 벼슬, 소모사(召募使)라고도 함

20) 安敏學(1542~1601) : 조선조 선조 때 문신. 자는 이습(而習), 호는 풍애(楓厓), 본관은 광주(廣州).

선조 때 학행(學行)으로 뽑혀 감찰 ․ 현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소모사로 활약함

21) 金瓚(1543~1599) : 조선조 선조 때 문신. 자는 숙진(叔珍), 호는 눌암(訥庵), 시호는 고헌(考獻), 본

관은 안동(安東). 문과에 급제하여 대사헌 ․ 이조판서에 이름. 임진왜란 때 선조를 호종하고 체찰부

사로 활약함

22) 湖西: 충청남북도를 합쳐 부르는 지명

23) 嶺南: 경상남북도를 합쳐 부르는 지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