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45. 권율權慄의 행주대첩幸州大捷

  • 관리자
  • 2021-08-28 오전 9:1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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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권율權慄이 왜적을 행주幸州15)에서 파하고 파주 坡州로 옮겼

다.

이보다 먼저 권율은 광주목사光州牧使로 있다가 이광李洸을 대신하여 순찰사巡察使

가 되어 근왕군[勤王]을 거느리게 되었다. 그는 이광 등이 들판에서 싸우다가 실

패한 것을 경계하여 수원水源에 이르러 독성산성禿城山城16)에 의거하니 왜적들은 감

히 쳐들어오지 못하였다. 그는 명나라 구원병이 장차 서울로 들어온다는 말을 듣

고는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幸州山城에 진陣을 쳤다.

이때에 이르러 왜적들은 서울로부터 크게 일어나 나와서 공격하여 왔는데, 군중軍

中의 인심은 흉흉하여지고 두려워하여 흩어지려 하였으나 그러나 강물이 뒤에 있어

서 달아날 길이 없었으므로 할 수 없이 도로 성으로 들어와서 힘을 다하여 싸우니

화살이 비오 듯 쏟아졌다.

왜적들은 부대를 세 진[三陣]으로 나누어 번을 갈아가며 쳐들어 왔으나 모두 패

하고 말았다. 때마침 날이 저물자 왜적들은 돌아서서 서울로 들어갔다. 권율은 군

사들로 하여금 왜적의 시체들을 가져다가 그 사지를 찢어 나뭇가지에 헤쳐 걸어놓

아 그 맺혔던 한을 풀었다.

얼마 뒤에 권율은 왜적이 다시 나와서 반드시 원수를 갚으려 한다는 말을 듣고는

몹시 두려워하여 병영과 목책[管柵]을 헐고 군사를 거느리고 임진강에 이르러 도원

수都元帥김명원金命元을 따랐다.

나는 이 말을 듣고 단기單騎로 달려가서 파주산성坡州山城17)으로 올라가 그 형세를

살펴보니 큰 길의 요충으로서, 그 지형이 험준하여 가히 근거지로 삼을 만하다고

생각하여 즉시 권율과 순변사巡邊使이빈李薲으로 하여금 군사를 모아가지고 굳게 지

켜 왜적의 군사들이 서쪽으로 내려오는 것을 막도록 하고, 방어사防禦使고언백高彦伯

․ 이시언李時言과 조방장助防將정희현鄭希玄․ 박명현朴名賢등을 유격병[遊兵]으로 삼아 해

유령蟹踰嶺을 막도록 하고, 의병장義兵將박유인朴惟仁․ 윤선정尹先正․ 이산휘李山輝등으로

하여금 오른쪽 길목을 따라 창昌․ 경릉敬陵18)의 사이에 복병을 베풀고 각각 그 군사

를 거느리고 출몰出沒하면서 공격하되, 왜적이 많이 나오면 피하여 싸우지 말고, 적

게 나오는 곳에 따라 맞아 치도록 하였다. 이로부터 왜적들이 성을 나와서 땔나무

와 마초도 뜯어갈 수 없어 말들이 매우 많이 죽었다.

또 창의사倡義使김천일 金千鎰․ 경기수사京畿水使이빈李薲․ 충청수사忠淸水使정걸丁傑

등으로 하여금 배를 타고 용산龍山․ 서강西江을 따라 왜적의 세력을 분산시키도록 하

고, 충청도순찰사忠淸道巡察使허욱許頊이 양성陽城에 있으므로 돌아가 충청도를 지키게

하여 왜적이 남쪽으로 부딪치려는 기세에 대비하도록 하고, 공문을 경기도 ․ 충청도 ․

경상도의 관군과 의병에게 보내어 각각 그곳에 있으면서 좌우로부터 왜적의 가는

길목을 막고 끊어 놓도록 하게하고, 양근군수陽根郡守이여양李汝讓으로 하여금 용진龍

津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모든 장수들은 벤 왜적의 머리를 다 개성부開城府의 남

문南門밖에 매달아 놓게 하였더니 제독 이여송과 참군參軍여응종呂應鐘이 이를 보고

기뻐하며 말하기를,

“조선인도 이제는 적의 머리를 자르는 것을 공을 쪼개는 것 같이 합니다 그려.”

하였다. 하루는 왜적이 동문東門으로부터 많이 와서 산을 수색하는데 양주楊州․ 적

성積城으로부터 대탄大灘까지 이르렀으나, 아무것도 얻은 것이 없었다. 명나라 장수

사대수査大受는 왜적의 습격을 받을까 두려워하여 나에에 알리기를,

“정탐하는 사람이 와서 하는 말이 ‘적들은 사총병査總兵(사대수査大受)과 류체찰柳體察

(류성룡柳成龍)을 사로잡으려 한다’고 말한다니, 잠시 동안 개성開城으로 피하는게 어

떻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대답하기를

“정탐하는 사람이 말한 것은 아마 그럴 리가 없을 것입니다. 왜적들은 지금 가까

이 와서 있게 될까 근심하고 있는데, 어찌 감히 경솔하게 강을 건너오겠습니까? 우

리들이 한 번 움직이면 민심이 반드시 동용될 것이니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만

같지 못할 것입니다.”

하였더니, 사대수는 웃으면서 말하기를,

“그 말은 아주 옳은 말입니다. 가령 적이 오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나는 체찰體察

(류성룡柳成龍)과 함께 죽고 사는 것을 같이 하지, 어찌 감히 혼자서 가겠습니까?”

하고, 드디어 거느리고 있는 군사 수십명을 나누어 보내와서 나를 보호하였는데,

비록 비가 심하게 온다 하더라도 밤새도록 경비하여 지키며 잠시도 게을리 하지 않

다가 왜적들이 성 안으로 들어간다는 말을 듣고서야 곧 그만두었다.

그 뒤에 왜적들은 권율權慄이 파주산성坡州山城에 있다는 사실을 탐지하고 원한을

갚으려고 하여 대군을 거느리고 서쪽 길로부터 나와 광탄光彈에 이르렀는데, 여기는

파주산성에서 몇 리 쯤 떨어졌으나 군사를 머물러 두고 진격하지는 못하였다. 왜적

들은 오시[午(정오)]로부터 미시[未(오후 1시부터 2시경)]까지 공격하지 않고 있다가

돌아서 물러간 뒤에는 다시 나오지 않았다. 이는 대개 왜적이 지형을 살필 줄 알아

서 권율이 의거하는 데가 매우 험절함을 보고 그렇게 하였던 것이었다.

나는 공문을 왕필적王必迪에게 보내 말하기를,

“왜적은 방금 험고한 데 의거하고 있으니 아직은 쉽사리 치지 못하겠습니다. 대

군은 마땅히 동파東坡로 나와 머무르고, 파주坡州에서는 그 뒤를 밟아 이를 견제하고,

남쪽의 군사 1만명을 뽑아 강화도로부터 한강의 남쪽에 나와 왜적의 뜻밖의 틈을

타서 여러 둔진을 격파하면 서울의 왜적들은 돌아갈 길이 끊어져서 반드시 용진龍津

으로 달아날 것입니다. 이럴 때에 뒤에 있는 군사로서 여러 강나루를 덮친다며, 가

히 한 번 군사를 일으켜 왜적을 소탕할 수가 있을 것입니다.”

하였더니 왕필적은 무릎을 치며 신기한 전략이라고 칭찬하면서 정탐꾼 36명을 내

어 충청도忠淸道의병장義兵將이산겸李山謙의 진陳으로 달려가 왜적의 형세를 살피게

하였다.

이때 왜적의 정예부대는 다 서울에 있고, 후방에 주둔한 군사는 다 약하고 파리

한 소수의 군사들이었다. 정탐하러 갔던 군사들이 좋아 날뛰면서 돌아와 보고 하기

“꼭 1만명의 군사들까지도 필요하지 않고, 다만 2, 3천 명이면 쳐부술 수가 있겠

습니다.”

하였다. 이제독李提督은 북방 출신의 장수였다. 그는 이 싸움에서 남방 출신의 군

사를 아주 억압하였는데, 이는 그 성공을 꺼려 뜻대로 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15) 幸州: 경기도 고양군에 있는 지명, 임진왜란 때 권율이 왜적을 쳐 크게 승리한 곳

16) 禿城山城: 경기도 수원의 독산성

17) 坡州山城: 경기도 파주에 있는 산성

18) 昌․ 敬陵: 창릉은 조선의 제8대 왕인 예종(睿宗)과 비(妃) 안순왕후(安順王后)의 능이고, 경릉은 덕종

(德宗)과 비 소혜왕후(昭惠王后)의 능이다. 모두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용두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