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44. 명나라 군사가 벽제碧蹄싸움에 지고 개성 開成으로 물러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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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26 오전 9:2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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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독李提督(이여송李如松)이 군사를 거느리고 파주坡州로 나아가서 왜적과 벽제碧

蹄8)의 남쪽에서 싸웠으나 불리하여 개성開城9)으로 돌아와서 주둔하였다.

이보다 먼저 평양성이 수복되자, 대동강大同江이남의 연도에 주둔하고 있던 적

도들은 다 도망하여 가버렸다. 제독提督이여송은 왜적을 추격하려 하여 나에게 일

러 말하기를

“대군이 바야흐로 전진하려 하는데, 앞길에 군량과 마초가 없다고 들립니다. 의

정議政(류성룡柳成龍)께서는 대신大臣으로서 마땅히 나라 일을 생각하여야 되겠으니

수고로움을 꺼리지 마시고 마땅히 급히 가서 군량을 준비하는 데 소홀하고 잘못

됨이 없도록 하십시오.”

하였다. 나는 그와 작별하고 나왔다. 이때 명나라 군사의 선봉은 벌써 대동강을

지나서 가고 있었는데, 어지럽게 길이 막혀 잘 다닐 수 없으므로 나는 옆길로 돌

아서 빨리 달려 군대의 앞에 나서서 밤에 중화中和로 들어갔다가 황주黃州에 이르

렀는데, 때는 이미 삼경[三鼓]이었다.

이때는 왜적의 군사들이 금새 물러간 뒤라서 길마다 거칠고 텅 비어 백성들이

모이지 않았으므로 어떻게 할 아무런 계교가 나지 않았다. 이에 급히 공문을 황

해감사黃海監司류영경柳永慶에게 보내어 군량의 운반을 독촉하게 하고, 또 공문을

평안감사平安監司이원익李元翼에게 보내어 김응서金應瑞등이 거느린 군사 중에서 싸

움터에 나가 견딜 수 없는 사람을 조발하여 평양으로부터 곡식을 운반하여 뒤따

라와서 이를 황주黃州까지 보내라고 하고, 또 배로 평안도平安道세 고을의 곡식을

옮겨 청룡포靑龍浦로부터 황해도黃海道로 옮기도록 하였으나, 일이 미리 준비하였던

것이 아니고 임시로 갑자기 급하게 서두르고 대군이 뒤따라오므로, 군량을 결핍시

키는 일이 일어날까 염려하고 이 때문에 애를 쓰고 속을 태웠다. 당시 류영경柳永

慶이 자못 저축하여 두었던 곡식이 있었으나 왜적들이 덮칠까 두려워하여 산골 사

이에 분산시켜 두었는데, 이때 백성들을 독려하여 수송하여 왔으므로 연도에서 군

량이 모자라는 데 이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조금 뒤에 대군이 개성부開城府에 들어

왔다.

정월 24일에 서울에 온 왜적들은 우리 백성들이 이에 내응할까 의심하고, 또

평양에서의 패한 것을 분하게 여겨 서울 안에 있는 백성들을 다 죽이고 관청, 개

인집 할 것 없이 다 불태워 거의 없애 버렸다. 그리고 서쪽 지방 여러 고을에 있

던 왜적들도 다 서울에 모여서 우리 군사에 항거할 것을 도모하였다.

나는 제독 이여송에게 연달아 속히 진군할 것을 청하였으나, 제독은 머뭇거리기

여러 날 만에 진군하여 파주坡州에 이르렀다.

그 다음날 부총병副總兵사대수査大受는 우리 장수 고언백高彦伯과 함께 군사 수백

명을 거느리고 먼저 가서 왜적의 동정을 탐정하다가 왜적과 벽제역碧蹄驛의 남쪽

여석령礪石嶺에서 서로 만나 왜적 백여 명을 베어 죽였다.

제독 이여송은 이 말을 듣고 대군大軍을 그대로 머물러 두고서 홀로 가정家丁으

로 말 잘 타는 사람 천여 명과 함께 그곳으로 달려오다가 혜음령惠陰嶺을 지나는

데, 말이 넘어져서 땅에 떨어지니 그 부하들이 함게 이를 붙들어 일으켰다. 이때

왜적은 많은 군사들을 여석령礪石嶺뒤에 숨겨 놓고 다만 수 백 명만 영마루 위에

나와 있었다. 제독 이여송은 이를 바라보고 그 군사를 지휘하여 두 부대를 만들

어 가지고 앞으로 나가니, 왜적들도 역시 영으로부터 내려와서 점점 서로 가까워

졌다. 그런데 뒤에 숨어 있던 왜적이 산 뒤로부터 갑자기 산위로 올라와서 진陣을

치니 그 수효가 몇 만 명이나 되었다. 명나라 군사들은 이를 바라보고 마음속으

로 두려워하였지만, 그러나 벌서 칼날을 맞댔으므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때 제독 이여송이 거느린 군사는 다 북방의 기병들이었으므로 화기火器는 없

었고 다만 짧은 칼을 가졌으나 무딘 것인데, 왜적들은 보병으로 칼이 다 3~4척이

나 되는 것을 써서 날카로운 것이 견 줄 수가 없었고, 서로 맞부딪쳐 싸우는데,

긴 칼을 좌우로 휘둘러 치니 사람과 말이 다 쓰러져 감히 그 날카로움을 당할 수

가 없었다. 제독 이여송은 그 형세가 위급한 것을 보고 후군後軍을 불러 보았으나

안 오고, 먼저 군사가 이미 패하여 사상자가 매우 많았는데, 왜적도 지쳐 군사를

거두고 급히 추격하지 않았다.

날이 저물 때 제독 이여송은 파주坡州로 돌아와서 비록 그 패한 일을 숨겼으나,

그러나 신기神氣가 매우 조상하였고 밤에는 가정家丁으로서 친히 믿던 사람들이 전

사한 것을 슬퍼하여 통곡하였다.

그 다음날 제독은 군사를 동파東坡로부터 후퇴시키려 하였다. 나는 우의정右議政

유홍兪泓․ 도원수都元帥김명원金明元․ 장수 이빈李薲 등과 함께 그 장막 밑에 이르니,

제독 이여송은 일어서서 장막 밖으로 나가려 하므로 여러 장수들이 좌우에 늘어

서고, 나는 힘써 간하기를,

“이기고 지는 일은 병가兵家에게는 항상 있는 일입니다. 마땅히 형세를 보아서

다시 나아갈 것이지 어찌 가볍게 움직이리오?”

하니, 이여송은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어제 적을 많이 죽였으니 불리한 일은 없지만, 다만 이곳은 비가

온 뒤 진창이 돼서 군사를 주둔시키기 불편하므로 동파東坡로 돌아가서 군사를 쉬

었다가 진격하려는 것입니다.”

하였다. 나와 여러 사람들이 그래서는 안 된다고 굳게 간하니, 제독 이여송은

이미 써놓은 상주할 초고[奏草]를 내보였다. 거기에 쓴 말 중에는,

“적병으로 서울에 있는 자가 20여 만 명이니 적은 많고 우리는 적어서 대적할

수가 없습니다.”

라는 말도 있고, 그 끝에는 말하기를,

“신臣은 병이 심하오니 청컨대 다른 사람으로 그 소임(제독)을 대신하게 하옵소

서.”

라고 하였다. 나는 깜짝 놀라면서 손으로 그 글을 지적하면서 말하기를, “왜적

의 군사는 아주 적은데 어찌 20만명이나 있겠습니까?”

하니, 제독 이여송은 말하기를,

“내가 어찌 이를 알 수 있겠습니까? 당신네 나라 사람이 그렇게 말한 것이지

요.”

라고 하였으나, 이는 대개 핑계하는 말이었다. 그 여러 장수들 가운데 장세작張

世爵은 더욱 제독 이여송에게 퇴병退兵하기를 권하였으며, 우리들이 굳이 간청하며

물러나가지 않는다고 해서 발길로 순변사巡邊使이빈李薲을 차며 물러가라고 꾸짖었

는데, 말소리와 낯빛이 다 격해 있었다.

이때에는 큰 비가 날마다 연달아 왔다. 또한 왜적들은 길가의 모든 산을 불태

웠으므로 다 민둥산이 되어 풀포기 하나 없었고, 거기다가 말 병까지 돌게 되어

서 며칠 동안에 쓰러져 죽은 말이 거의 만 필이나 되었다.

이 날 삼영三營의 군사들이 임진강을 건너 돌아가서 동파역東坡驛앞에 주둔하였

다. 그 다음날 동파역으로부터 또 개성부開城府로 돌아가려고 하였다. 나는 또 간

쟁하기를,

“대군이 한번 물러가면 왜적들의 기세가 더욱 교만하여지고, 멀고 가까운 곳의

백성들이 놀라고 두려워하여 임진강 이북도 또한 보전할 수가 없을 것이니, 원컨

대 좀더 머물러 있으면서 틈을 보아서 이동하도록 하소서.”

하니 제독 이여송은 거짓으로 이를 허락하였다. 내가 물러나온 뒤에 제독 이여

송은 곧 말을 타고 드디어 개성부開城府로 돌아가니, 여러 병영이 모두 개성으로

물러갔다. 오직 부총병副總兵사대수査大受와 유격遊擊관승선毌承宣의 군사 수백명이

임진강을 지켰다. 나는 그대로 동파東坡에 머물러 날마다 사람을 보내 다시 진병進

兵할 것을 청하였는데, 제독 이여송은 거짓으로 이에 응낙하여 말하기를,

“날씨가 개고 길이 마르면 마땅히 진격할 것입니다.”

하였다. 그러나 사실은 진격할 의사가 없었다.

대군이 개성부開城府에 이르러 여러 날이 되어 군량이 이미 다하였는데, 오직 수

로水路로 조[栗]와 마초를 강화도에서 가져왔고, 또 배[船]로 충청도 ․ 전라도의 세곡

稅穀을 조금씩 옮겨 왔으나 그것은 이르는 대로 없어져서 그 형세가 급박하였다.

하루는 명나라 여러 장수들이 군량이 다 떨어졌다는 것을 핑계 삼아 제독 이여송

에게 군사를 돌리자고 청하였다. 제독 이여송은 노하여 나와 호조판서戶曹判書이성

중李誠中10)과 경기좌감사京畿左監司이정형李廷馨11)을 불러 뜰 아래 꿇어앉히고는 큰

소리로 꾸짖으며 군법으로써 다스리려 하였다. 나는 사과하기를 마지않았으며 인

하여 나라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을 생각하여 나도 모르는 새 눈물을 흘리니,

제독 이여송이 민망하게 여기면서 다시 그 여러 장수들에게 성을 내며 말하기를,

“너희들이 지난 날 나를 따라서 서하西夏12)를 칠 때에는 군사들이 여러 날을 먹

지 못하였어도 오히려 감히 돌아가겠다고 말하지 않고 싸워 마침내 큰 공을 세웠

는데, 지금 조선朝鮮이 우연히 며칠 군량을 지급하지 못하였다고 어찌 감히 갑자기

군사를 돌리겠다고 말하느냐? 너희들이 어디 가려면 가봐라. 나는 적을 멸망시키

지 않고는 돌아가지 않겠다. 오직 말가죽으로 시체를 싸가지고 가려 할 따름이다.

라고 하니, 여러 장수들이 다 머리를 조아리며 사과하였다.

나는 문 밖으로 나온 다음, 군량을 제때에 공급하지 못한 죄로 개성경력開城經歷

심예겸沈禮謙을 곤장으로 다스렸더니, 계속하여 군량을 실은 배 수십척이 강화도로

부터 와서 뒷 서강西江에 닿았으므로 겨우 아무런 일이 없었다. 이날 저녁에 제독

이여송은 총병總兵장세작張世爵을 시켜 나를 불러 위로의 뜻을 표한 다음, 또 군사

軍事에 관하여 의논하였다.

제독 이여송이 평양平壤으로 돌아갔다. 이때 왜적의 장수 가등청정은 아직도 함

경도咸鏡道에 있었는데 어떤 사람이 말을 전하기를, “가등청정 곧 함흥咸興으로부터

양덕陽德․ 맹산孟山을 넘어 평양성을 습격하려 한다.”고 하였다. 이때 제독 이여송은

북으로 돌아가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 기회를 얻지 못하였다가 이 말에

따라 성언하기를,

“평양은 곧 근본이 되는 곳이므로 만약 여기를 지키지 않으면 대군이 돌아갈

길이 없어질 것이니, 여길 구하지 않을 수 없다.”

하며 드디어는 군사를 돌려 평양성으로 돌아가고, 왕필적王必迪을 머물러 두어

개성開城을 지키게 하였다. 그리고 그는 접반사接伴使13) 이덕형李德馨에게 이르기를,

“조선朝鮮군사도 형세가 외롭고 구원병도 없으니 마땅히 모두 임진강 북쪽으로

돌아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전라도순찰사全羅道巡察使권율權慄14)이 고양군[高揚]의 행주幸州에 있

고, 순변사巡邊使이빈李薲이 파주坡州에 있고, 고언백高彦伯과 이시언李時言이 해유령蟹

踰嶺에 있고,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임진강 남쪽에 있고, 내가 동파東坡에 있었는데,

제독 이여송은 왜적들이 틈타 쳐들어올까 두려워하여 그렇게 말한 것이다.

나는 종사관從事官신경진辛慶晉으로 하여금 달려가서 제독 이여송을 보고 군사를

물러가게 해서는 안 될 이유 다섯 가지를 들어 설명하였는데 그 내용을 들면,

“첫째로 선왕先王의 분묘墳墓가 다 경기[畿甸]안에 있는데, 지금 왜적들이 있는 곳

에 빠졌으므로 신神이나 사람이나 수복을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니 차마 버리고 가

서는 안 될 것이고, 둘째로는 경기도 이남에 있는 백성들을 날마다 구원병이 오

는 것을 바라고 있는데 갑자기 물러갔다는 말을 듣게 되면 다시 굳게 지킬 뜻이

없어져 서로 거느리고 왜적에게 의지할 것이고, 셋째로는 우리나라의 강토는 한자

한치[尺寸]라도 쉽사리 버릴 수 없는 것이고, 넷째로는 우리 장병들은 비록 힘이

약하다 하더라도 바야흐로 명나라 구원병의 힘을 의지하여 함께 진격하려고 도모

하는데, 한 번 철퇴하라는 명령을 듣게 되면 반드시 다 원망하고 분개하여 사방

으로 흩어져 버릴 것이고, 다섯째로 구원병이 물러간 뒤에 왜적들이 그 뒤를 타

서 덤벼들면 비록 임진강 이북이라 하더라도 역시 보전할 수 없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러나 제독 이여송은 이것을 보고도 아무 말 없이 떠나갔다.

 

 

8) 碧蹄: 서울의 서쪽 고양군에 있는 지명. 옛날에는 여기에 역관(驛館)이 있어, 중국 사신이 오갈 때

머무른 곳이며, 임진왜란 때에는 명장 이여송(李如松)이 왜적과 격전한 곳

9) 開城: 경기도 서북부에 위치한 지명. 옛날 고려의 서울

10) 李誠中(1539~1593) : 조선조 선조 때 문신. 자는 공저(公著), 호는 파곡(坡谷), 본관은 전주(全州).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 때 통어사(統禦使)로 서울을 방어하다가 의주로 가서 임금을 모시

고, 호조판서가 되어 군량 보급에 힘쓰다가 함창에서 순직함.

11) 李廷馨(1548~1607) : 조선조 선조 때 명신. 자는 덕훈(德薰), 호는 지퇴당(知退堂), 본관은 경주(慶

州). 문과에 급제하여 요직을 맡고, 임진오란 때에는 개성 유수로 활약하다가 벼슬이 경기도관찰

사 ․ 대사헌에 이름.

12) 西夏: 중국 감숙성(甘肅省)에서 내가고(內家古)의 서부에 걸친 지방.

13) 接伴使: 임금을 모시며 외국 사신의 접대를 맡은 임시직.

14) 權慄(1537~1599) : 조선조 선조 때 도원수.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 시호는 충장(忠

壯), 본관은 안동(安東). 선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예조좌랑 ․ 호조정랑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광

주목사에서 전라도순찰사가 되어 북상하여 수원 등지에서 왜적을 쳐 그 서진(西進)을 막고 행주

산성에서 대승하고, 도원수가 되어 전군을 지휘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