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60. 최후最後의 결전決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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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26 오후 5:2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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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에 유제독劉提督(유정劉綎)이 다시 순천順天에 있는 왜적의 병영을 공격하고,

통제사統制使이순신李舜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왜적의 구원병을 바다 가운데서 크게

쳐부쉈는데, 이순신은 여기에서 전사하였다. 이 싸움에 왜적의 장수 평행장平行長

(소서행장小西行長)은 성城을 버리고 도망하였고, 부산釜山․ 울산蔚山․ 하동河東의 연해

안에 둔쳤던 왜적들도 모두 물러가 버렸다.

이때 소서행장은 성城을 순천順天의 예교芮橋에 쌓고 굳게 지켰는데, 유정劉綎은

대군을 거느리고 나아가 공격하였으나 불리하여 순천으로 돌아왔다가 얼마 뒤에

다시 나아가 이를 공격하였다.

이순신李舜臣은 명나라 장수 진인陳璘과 함께 바다의 어귀를 눌러 잡고 가까이 쳐

들어가니, 왜적의 장수 소서행장은 사천泗川에 있는 왜적의 장수 심안돈오沈安頓吾에

게 구원을 요구하니, 심안돈오는 군사를 거느리고 수로水路로부터 와서 구원하였는

데, 이순신은 나아가 공격하여 왜적의 배 2백여 척을 불태우고, 왜적을 죽인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이때 아군은 도망하는 왜적을 남해南海의 지경[露梁]까지

추격하였다. 이순신은 몸소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힘을 다하여 싸웠는데, 날아오는

총알이 그의 가슴에 맞아 등 뒤로 빠져나갔다. 이에 좌우에 모시던 사람들이 부

축하여 장막 안으로 들어가니 이순신은 말하기를,

“싸움이 바야흐로 급하니 삼가 내가 죽은 것을 말하지 말라.”

하는 말을 마치고 숨을 거두었다.

이순신의 형의 아들 이완李莞은 평소에 담력과 도량이 있는 사람이라, 그의 죽음

을 숨기고는 이순신의 명령으로써 싸움을 독려함이 더욱 급하니, 군중에서는 이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이럴 때 진인陳璘이 탄 배가 왜적에게 포위를 당하니 이완

은 이를 바라보고는 그 군사를 지휘하여 그를 구원하였다. 왜적들이 흩어져 달아

난 뒤에 진인은 사람을 이순신에게 보내어 자기를 구원하여 준 것을 사례하였는

데,

이때 비로소 그가 전사한 것을 알고 앉아 있던 의자 위로부터 펄썩 땅바닥에

주저앉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노야老爺(이순신李舜臣)가 와서 나를 구하여 준 줄로 여겼는데, 어쩌다가 돌

아가셨단 말입니까?”

하고는 가슴을 치며 크게 통곡하니, 전 군사들이 다 통곡하여 그 울음소리가 바

다 가운데 진동하였다. 왜적의 장수 소서행장은 우리 수군이 추적하여 그 병영을

지나가는 때를 틈타서 뒤로부터 빠져 나와 달아나고 말았다.

이보다 먼저 7월에 왜적의 우두머리인 풍신수길이 이미 죽었었다. 그러므로 바

다 연변에 진을 치고 있던 왜적들은 모두 물러가 버렸다. 우리 군사와 명나라 군

사들은 이순신이 전사하였다는 말을 듣고 연달아 모든 진영이 통곡하여 마치 자

신의 어버이가 세상을 떠난 것처럼 슬퍼하였고, 그의 영구 행렬이 이르는 곳마다

백성들은 곳곳에서 제사를 베풀고는 영구차를 붙들고 울면서 말하기를,

“공公께서는 실로 우리를 살려놓으시더니 지금 우리를 버려두고 어디로 가십니

까?”

하며 길을 막아서 영구차가 지나갈 수가 없었고, 길가는 사람들도 눈물을 흘리

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나라에서 그에게 의정부우의정議政府右議政을 추증하였다. 이때 형군문邢軍門(형개邢

玠)은 “마땅히 그 사당을 바닷가에 세워서 그 충혼忠魂을 표창하여야 한다.”고 하였

으나, 그 일은 마침내 실행되지 않았다. 이에 있어서 바닷가의 사람들이 서로 모

여 사당을 짓고 민충사愍忠祠라 부르며 때에 따라 제사를 지내고, 장사하는 사람들

과 어선漁船들이 왕래할 때 그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