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월에 양경리楊經理(양호楊鎬) ․ 마제독麻提督(마귀麻貴)은 기병과 보병 수만명을 거느
리고 경상도慶尙道로 내려가서 울산蔚山에 있는 왜적의 진영으로 나아가 공격하였다.
이때 왜적의 장수 가등청정이 성을 울산군蔚山郡의 동해 바닷가 험준한 곳에 쌓
고 있었는데, 양호 경리와 마귀 제독은 그들의 뜻밖의 기회를 틈타서 엄습하여
날랜 기병대로 몰아치니, 왜적들은 쓰러져 감히 견디지 못하였다. 명나라 군사가
왜적의 외책外柵(외성外城)을 빼앗으니 왜적들은 달아나 내성內城으로 들어갔다. 명
나라 군사들은 왜적이 두고 간 전리품의 노획을 탐내어 즉시 진공하지 않았는데,
왜적들은 성문을 닫고 굳게 지키므로 이를 공격해도 이기지 못하였다. 명군의 여
러 진영에서는 성 아래 나누어 주둔하고, 성을 포위한 지 13일이나 되어도 왜적
들은 나오지 않았다.
29일에 내가 경주慶州로부터 울산으로 가서 양경리와 마제독을 만나보았는데,
왜적의 진루[壘]를 바라보니 매우 고요하고 한가로와 사람의 소리도 없이 적적하
였고, 성 위에는 여장女裝을 베풀지 않고 사면을 둘러 장랑長廊을 만들어 지키는
군사들은 모두 그 안에 있다가 밖의 군사가 만약 성 밑에 이르면 총탄을 비가 쏟
아지듯 어지럽게 쏘았다.
날마다 이런 싸움이 되풀이되어 명나라 군사와 우리나라 군사의 주검이 성밑에
쌓이게 될 뿐이었다. 이때 왜적의 배가 서생포西生浦로부터 와서 돕는데, 물속에
벌여 정박한 것이 마치 물오리떼와 같았다.
이 섬 안에는 물이 없어서 왜적은 밤마다 성 밖으로 출몰하므로, 양경리는 김
응서金應瑞로 하여금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성 밖의 샘 곁에 복병을 설치하게 하여
밤마다 연달아 백여 명을 사로잡았는데, 그들은 다 굶주리고 파리하여 겨우 목숨
을 부지하고 있었다. 여러 장수들은 “성 안에는 양식이 끊어졌으니 오랫동안 포위
하고 있으면 왜적들은 장차 저절로 무너져 버릴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이때는 날씨가 몹시 춥고 게다가 비가 와서 군사들은 손발이 얼어터졌다.
얼마 뒤에 왜적은 또 육로로부터 와서 구원하니, 경리 양호는 그 공격을 당하
게 될까 두려워하여 갑자기 군사를 돌리고 말았다.
정월(1598)에 명나라 장수들은 모두 서울로 돌아가서 다시 진격할 일을 도모
하였다.
무술년戊戌年(선조宣祖31년, 1598) 7월에 경리經理양호楊鎬가 파면되고, 새 경리로
만세덕萬世德78)이 그를 대신하여 왔다. 이때 형개邢玠의 참모관參謀官인 병부주사兵部
主事정응태丁應泰는 ‘양호가 속이다가 일을 그르친 20여 가지 죄’를 탄핵하여 아뢰
었기 때문에 양호는 드디어 파면되어 가게 된 것이다.
임금께서는 양호가 여러 경리들 가운데서 왜적을 토벌하는 데 가장 힘썼다고
해서 즉시 좌의정左議政이원익李元翼을 파견하여 그를 구제하는 주문奏文을 가지고
명나라 서울로 달려가게 하였다.
8월에 양호가 서쪽으로 떠나가므로 임금께서는 홍제원弘濟院의 동쪽까지 나가서
보냈는데, 눈물을 흘리면서 이별하였다. 만세덕萬世德은 곧 출발하였으나 아직 도착
하지는 않았다.
9월에 형개邢玠는 또 여러 장수들을 나누어 배치하였는데, 마귀麻貴는 울산蔚山을
맡게 하고, 동일원董一元은 사천泗川을 맡게 하고, 유정劉綎은 순천順天을 맡게 하고,
진인陳璘은 수로水路를 맡게 하여 동시에 진공하게 하였으나 다 불리하였고, 동일원
의 군대는 왜적에게 패한 바 되어 죽은 사람이 더욱 많았다.
78) 萬世德: 명나라 장수. 병법을 잘 알고 기사(騎射)에 능하여 우포정(右布政)에 임명되었다. 정유재
란 때 첨도어사(僉都御使)로 양호를 대신하여 경리가 되어 우리나라에 와서 공을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