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제사統制使이순신李舜臣이 왜적을 진도珍島의 벽파정碧波亭73)에서 쳐부수고, 그
장수 마다시馬多時를 잡아 죽였다.
처음에 이순신은 진도에 이르러 병선을 거두고 모아 10여 척을 얻었다. 이때
연해沿海지방의 백성들로서 배를 타고 피란하는 사람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는데,
이순신이 왔다는 말을 듣고는 기뻐하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이순신이 여러 길로
나누어 이들을 불러 모으니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에 그들을 군軍의 뒤에 있게 하여 싸움을 돕는 형세를 취하도록 만들었다.
왜적의 장수 마다시馬多時는 해전을 잘한다고 이름났는데, 그는 전선[船] 2백여
척을 거느리고 서해西海를 침범하려 했으나 이순신이 거느린 군사와 진도의 벽파
정碧波亭아래에서 서로 만났다. 이 때 이순신은 12척의 배에 대포大砲를 싣고 조수
의 흐름을 이용하여 순류順流에 이르러 이를 공격하니, 왜적들은 패하여 달아나 버
렸다. 이에 이순신이 거느린 군대의 명성이 크게 떨치게 되었다.
이때 이순신에게는 이미 군사 8천여 명이 있어서 고금도古今島74)에 나아가 주둔
하였는데, 식량이 궁핍할 것을 근심하여 해로통행첩海路通行帖을 만들고 명령하기를,
“3도(경상 ․ 전라 ․ 충청도)의 연해를 통행하는 공사公私선박으로서 통행첩이 없는
것은 간첩선으로 인정하고 통행할 수 없게 한다.”하였다.
이에 있어서 난을 피하며 배를 탄 사람들은 다 와서 통행첩을 받았다. 이순신은
그 배의 크고 작은 차이에 따라서 쌀을 바치고 통행첩을 받게 하였는데, 큰 배는
3석石, 중간 배는 2석, 작은 배는 1석으로 정하였다. 이때 피란하는 사람들은 그
재물과 곡식을 다 싣고 바다로 들어오는 까닭으로 쌀 바치는 것을 어렵게 여기지
않고 통행을 금지하는 일이 없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래서 10여일 동안에 군량 1
만여 석을 얻었다. 이순신은 또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구리[銅] ․ 쇠[鐵]를 모아 대포
大砲를 주조하고, 나무를 베어 배를 만들어서 모든 일이 다 잘 추진되었다. 이때
먼 곳 가까운 병화를 피하는 사람들이 다 이순신에게로 와서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막사를 만들고 장사를 하며 살아가니, 이들을 성안에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얼마 있다가 명나라 수병도독水兵都督진인陳璘75)이 나와서 남쪽으로 고금도古今島
에 내려와 이순신과 함께 군사를 합세하게 되었다. 진인은 성질이 사나와서 남과
거스르는 일이 많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
임금께서는 그를 내려 보낼 때 청파靑坡의 들판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다.
나는 진인의 군사가 고을의 수령守令을 때리고 욕하기를 꺼리지 않고, 새끼줄로
찰방察訪이상규李尙規의 목을 매어 끌어서 온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통
역관을 통하여 풀어 주도록 하라고 권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나는 함께
앉아 있던 재신宰臣들에게 일러 말하기를,
“애석하게도 이순신의 군사가 또 장차 패할 것 같습니다. 진인과 함께 군중軍中
에 있으면 행동하는 것이 억눌리고 의견이 서로 맞지 않겠으며, 그는 반드시 장
수의 권한을 침탈하고 군사들을 마음대로 학대할 것인데, 이를 거스르면 더욱 성
낼 것이고, 그대로 따라 주면 꺼리는 일이 없을 것이니, 이순신의 군사가 어찌 패
전하기 않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하니, 여러 사람들도 “그러겠습니다.”라고 말하며 서로 탄식할 따름이었다.
이순신은 진인이 장차 온다는 말을 듣고서 군사들로 하여금 크게 사냥을 하고
물고기를 잡게 하였더니, 사슴 ․ 산돼지와 바닷고기들을 잡은 것이 매우 많았다. 이
로써 잔치를 성대하게 준비하고 기다리며, 진인의 배가 바다로 들어올 때 이순신
은 군사적 위의를 갖추고 멀리까지 나와서 맞아들였다. 그리고 진인이 도착하자
그 군사를 크게 대접하니 여러 장수 이하 모두가 흡족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졸들은 서로 전하여 이야기하기를,
“이순신은 과연 훌륭한 장수다.”
하였으며, 진인도 또한 마음속으로 진정 기뻐하였다.
오래지 않아서 왜적의 배가 가까운 성을 침범하므로, 이순신은 군사를 파견하여
이를 쳐부수고, 적의 머리 40급을 베어 모두 진인에게 주어 그의 공으로 만드니,
진인은 소망보다 후한 대접이라 더욱 기뻐하였다. 이로부터 모든 일은 일체 이순
신에게 물어서 처결하였으며, 밖으로 나갈 때면 이순신과 가마[轎]를 나란히 하고
감히 먼저 가지 않았다. 이순신은 드디어 진인과 약속하여 명나라 군사와 자기
군사를 구별함이 없이 백성들의 조그만 물건이라도 빼앗는 사람이 있으면 잡아다
가 매를 치게 하니, 감히 그 명령을 어기는 사람이 없어서 섬 안이 조용하였다.
진인은 임금에게 글을 올려 말하기를,
“통제사統制使(이순신李舜臣)는 경천위지지재經天緯地之才76)와 보천욕일지공補天浴日之
功77)이 있습니다.”
하였다. 이는 대개 마음으로 감복한 까닭이었다.
73) 碧波亭: 전라남도 진도에 있는 지명
74) 古今島: 전라남도 장흥반도와 해남반도 사이에 있는 섬
75) 陳璘: 명나라 신종 때 무장. 세종 때 지휘첨사(指揮僉使)가 되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수병도독으로
군사를 거느리고 우리나라에 와서 이순신과 더불어 왜적을 치는 데 큰 공을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