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적이 남원부南原府를 함락시켰다. 이 싸움에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이 도망하여
달아나고, 전라병사全羅兵使이복남李福男68) ․ 남원부사南原府使임현任鉉69) ․ 조방장助防將
김경로金敬老․ 광양현감光陽縣監이춘원李春元․ 당장접반사唐將接伴使정기원鄭期遠70) 등은
다 전사하였다. 군기시軍器寺의 파진군破陣軍12명도 양원楊元을 따라 남원南原에 들어
갔다가 다 적병에게 죽음을 당하였다. 다만 김효의金孝義라는 자가 거기서 벗어날
수 있어서 나에게 남원성이 함락된 사실을 아주 자세하게 말하였다.
양총병楊總兵(양원楊元)이 남원南原에 이르러서는 성을 한 길 너머나 더 올려 쌓고
성 밖의 양마장羊馬牆에는 포砲를 쏠 구멍을 많이 뚫어 놓고, 성문에는 대포大砲두세
대를 설치하고 깊은 참호를 한두 길이나 파놓았다.
한산도閑山島가 패한 뒤에 왜적은 수륙水陸으로부터 남원성으로 달려와서 사태가
매우 급박하다는 보고가 들어오니, 성 안은 술렁거리고 백성들은 도망하여 흩어지
고, 다만 양총병이 거느린 요동마군遼東馬軍3천명만이 성안에 있었다. 양총병은 격
문으로 전라병사全羅兵使이복남을 불러 함께 지키자고 하였으나, 이복남은 날짜를
지연시키면서 이르지 않으므로, 연달아 야불수夜不收71)를 재어 오기를 재촉하니 그
는 마지못하여 왔는데, 거느리고 온 군사는 겨우 수백명이었다. 광양현감光楊縣監
이춘원李春元과 조방장助防將김경로金敬老등도 뒤를 이어 이르렀다.
8월 13일에 왜적의 선봉 백여 명이 남원성에 이르러 조총鳥銃을 쏘다가 잠깐 뒤
에 그만두고 다 흩어져 밭고랑 사이에 엎드려 삼삼오오로 떼를 지어 갔다왔다하며
공격하였다. 성 위에 있는 우리 군사들은 승자소포勝字小砲72)로 이에 응사하였는데,
왜적의 대부대는 멀리 진을 치고 있으면서 유격병을 내어 교전하게 하고, 드문
드문 줄을 지어 나와 싸우는 까닭으로 포를 쏴도 잘 맞지 않았다. 그러나 성을
지키던 군사들은 왕왕 왜적이 쏜 총알을 맞고 쓰러졌다. 조금 뒤에 왜적이 성 밑
에 이르러 성 위 사람에게 소리를 질러 함께 의논하기를 요구하므로, 양총병은
가정家丁한 사람을 시켜 통사通事를 데리고 왜적의 병영으로 갔다가 왜적의 글을
가지고 왔는데, 이는 곧 싸움을 다짐하는 글[約戰書]이었다.
8월 14일 왜적은 남원성을 3면으로 둘러싸 진을 치고는 총포를 번갈아 쏘며 전
날처럼 공격하여 왔다. 이보다 먼저 성의 남문밖에는 민가民家가 조밀하게 있었는
데, 왜적들이 달려들 무렵에 양총병은 이를 불태워 버리게 하였으나 돌담이나 흙
벽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왜적들이 몰려와서는 이 담과 벽 속에 의지하여 몸을
숨기고는 총을 쏘아 성 위에 있는 사람이 많이 맞았다.
8월 15일에 바라보니, 왜적들은 성 밖의 잡초와 논의 벼를 베어 큰 다발을 수
없이 만들어 담벽 사이에 쌓아 놓았으나 성 안에서는 그것이 무슨 목적에서인지
헤아리지를 못하였다.
이때 명나라 유격장군遊擊將軍진우충陳愚衷이 3천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전주全州에
있었으므로, 남원성南原城의 군사들은 날마다 와서 도와주기를 바랐으나, 오래도록
이르지 않았으므로 군사들의 마음은 더욱 두려워졌다.
이날 저녁때에 성첩을 지키던 군사들이 왕왕 머리를 맞대고 귀엣말로 수군거리
더니, 말안장을 준비하는 등 도망하려는 기색이 있었다. 밤 일경一更(8시경)에 왜
적의 진중에서 떠드는 소리가 크게 일어나더니 서로 호응하며 물건을 운반하는
모양도 보이고, 그리고 한편으로는 모든 포가 성을 향하여 어지럽게 쏘아 탄환이
날아와 성 위에 떨어지는데 마치 우박이 쏟아지는 것과 같았다. 그래서 성 위 사
람들은 목을 움츠리고 감히 밖을 엿볼 수가 없었다. 한두 시간쯤 지나서 떠드는
소리가 그쳤는데, 묶어 세웠던 풀다발은 이미 호를 평평하게 메웠고, 또 풀 다발
을 양마장羊馬牆안팎에도 무더기로 쌓아올려 잠깐 동안에 성의 높이와 가지런하였
으며, 여러 왜적들이 이것을 밟고 성으로 올라오니 이미 성안은 크게 어지러워지
고, 왜적들이 성안으로 들어섰다고들 떠들었다.
김효의金孝義는 처음에 남문 밖의 양마장羊馬牆는 처음에 남문 밖의 양마장羊馬牆을
지키고 있다가 황망히 성 안으로 들어와 보니 성 위에는 벌써 사람이 없었고, 다
만 성 안의 곳곳에서 불길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달아나서 북문에
이르렀는데, 명나라 군사는 모두 다 말을 타고 성문을 나가려 하였으나, 문이 굳
게 닫혀 쉽게 열 수가 없어서 말들의 발을 묶어 놓은 것과 같이 길거리를 꽈 메
웠다. 조금 있다가 성문이 열리자 군마가 다투어 나갔는데, 왜병들이 성 밖에서
두 겹 세겹으로 둘러싸고 각각 요로를 지키고 있다가 긴 칼을 휘둘러 어지럽게
내려찍으니 명나라 군사는 머리를 숙이고 칼을 받을 따름이었다. 마침 달이 밝아
서 빠져나간 사람은 얼마 안되었다. 이때 양총병은 가정家丁몇 사람과 말을 달려
빠져나가 겨울 죽음은 면하였는데,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왜적이 총병(양원)인 줄 알면서도 짐짓 달아나게 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김효의는 동반한 한 사람과 함께 성문을 나오다가 그 한 사람은 왜적을 만나서 죽
고, 김효의 자신은 논으로 뛰어들어 풀 속에 엎드려 있다가 왜적들이 군사를 거두어
가지고 물러가는 것을 기다려서야 빠져 나왔다고 한다.
대게 양원은 곧 요동의 장수[遼將]로서, 다만 오랑캐를 막을 줄만 알았을 뿐이지
왜적을 막을 줄은 알지 못하였으므로 이렇게 패하는 데 이르렀다.
또한 평지平地의 성城을 지키기란 매우 어렵다는 것을 알겠으므로, 김효의가 말
한 것을 자세히 적어서 뒷날에 성을 지키는 사람들로 하여금 경계해야 할 것을
알리려 한다.
남원성南原城이 함락되자 전주全州이북의 성들은 와해되어 어찌할 수가 없었다.
뒤에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은 마침내 이 일로 죄를 얻어 참형을 당하고, 베인머
리는 순시徇示하였다.
68) 李福男(?~1597) : 조선조 선조 때의 무관, 시호는 충장(充壯), 본관은 우계(羽溪). 정유재란 때 왜적
이 남원성을 치자 전라병사로 이를 구하려다가 전사함
69) 任鉉(1549~1597) : 조선조 선조 때의 문관. 자는 사애(士愛), 호는 애탄(愛灘), 시호는 충간(忠簡),
본관은 풍천(豊川). 문과에 급제하여 회양부사 ․ 길주목사 ․ 함경도병마절도사를 지내고, 정유재란
대 남원부사로 왜적을 막다가 전사함
70) 鄭期遠(?~1597) : 조선조 선조 때의 문관. 자는 사중(士重), 호는 견산(見山), 시호는 충의(忠毅), 본
관은 동래(東萊).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판에 이르렀다. 정유재란 때 명장 양원(楊元)의 접반
사로 남원성전(南原城戰)에 참가하여 왜적을 막다가 전사하였다.
71) 夜不收: 군중탐정(軍中探偵)의 칭호
72) 勝字小砲: 무기명. 화포의 일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