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70. 임진강臨津江에 부교浮橋를 가설함

  • 관리자
  • 2021-10-12 오전 9:21:00
  • 2,267
  • 메일

 계사년(선조宣祖26년, 1593) 정월에 명나라 군사가 평양平壤을 출발하므로 나는 그 군사보다 앞서서 떠났다. 이때 임진강에는 얼음이 풀려서 건너갈 수 없었는데,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이 연달아 사람을 파견하여 부교浮橋를 만들라고 독촉하였다.

 내가 금교역金郊驛에 이르렀을 때 황해도黃海道수령守令이 아전과 백성을 거느리고 대군大軍(명나라 군사)에게 식사를 대접하느라고 들판에 가득 찬 것을 보았다.

 나는 우봉현령牛峰縣令이희원李希愿을 불러 “거느리고 있는 고을 사람이 얼마나 되는가?”를 물으니, 그는 “수백명에 가깝습니다.”하였다.

  나는 그에게 분부하기를,

“그대는 빨리 고을 사람을 거느리고 산에 올라가서 칡덩굴을 뜯어 가지고 내일 나와 임진강 어귀에서 만나도록 하되, 때를 어겨서는 안될 것이다.”

하였다.

 이희원은 곧 물러갔다. 이튿날 나는 개성부開城府에서 자고, 또 그 다음날 새벽에 말을 달려 덕진당德津堂에 이르렀는데, 보니 강의 얼음이 아직 다 풀리지 않았고, 성에[流澌]가 반 길쯤이나 흐르고 있어서 하류의 배가 올라올 수 없었다. 이때 경기도순찰사京畿道巡察使권징勸懲․ 수사水使이빈李薲․ 장단부사長湍府使한덕원韓德遠과창의추의군倡義秋義軍천여 명이 강가에 모였으나 다 어찌할 계교가 없었다.

 나는 우봉牛峰사람을 부르도록 영을 내려 칡으로 새끼를 꼬아 들이게 하여 큰 밧줄을 만들었는데, 크기는 두어 아름이나 되고 길이는 강물을 건너 놓을 만하였다.

 이에 강의 남쪽과 북쪽의 언 땅에 각각 두 개의 기둥을 세워 서로 마주보게하고, 그 안에 하나의 가름대나무를 뉘어 놓고 큰 새끼밧줄 열다섯 가닥을 땋아

강물 위에 늘여서 양쪽 머리를 가름대나무에 동여매었는데, 강이 넓고 멀어서 새끼밧줄이 반쯤 물에 잠겨 일어나지 않았다. 여러 사람이 말하기를,

“쓸데없이 인력만 소비하였다.” 고 하였다.

 나는 천여 명으로 하여금 각각 2~3척쯤 되는 짧은 막대기를 가지고 칡 새끼줄을 뚫어 꿴 다음 힘을 다하여 몇 바퀴를 돌리고 서서 버티어 일으키게 하였더니

마치 빗살처럼 알맞게 늘여졌다. 이에 많은 밧줄로 잘 엮어 묶은 다음 높이 일궈 세우니 구부정한 활처럼 공중에 놓여 엄연한 다리 모양이 되었다.

 다음에 가는 버드나무를 베어 그 위에 깔고 풀을 두껍게 덮고 흙을 깔아 다져 놓았다.

 이렇게 다리가 이룩되자 명나라 군사는 이를 보고 크게 기뻐하여 다 채찍을 휘두르며 말을 달려 지나가고 포차砲車와 군기軍器도 다 여기를 지나 건너갔다. 조금뒤에 건너는 사람이 더욱 많아지자 엮어 묶은 새끼줄이 자못 늘어져서 물에 가까워졌는데, 대군은 얕은 여울을 따라 건넜으므로 나무랄 것이 없었다.

 나는 생각해 보니, 그때 갑작스레 칡을 준비한 것이 많지 않았으나, 다시 그 배 쯤 구하여 30가닥쯤 만들었다면 새끼밧줄이 더 잘 엮어져서 늘어지는 일이 없었을 것이다.

 뒤에 남북사南北史를 보니, 제齊나라 군사가 양나라 임금[梁主] 귀蘬를 치니, 그는 주나라 총관[周總官] 육등陸騰과 함께 이를 막았는데, 주나라 사람들은 협구峽口의남쪽 언덕에 안촉성安蜀城을 쌓고서 가로 큰 새끼줄을 강 위에 당겨 매고 갈대를 엮어 다리를 만들고 군량을 건너 옮겼다고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이 법이었다.

나는 스스로 이르기를,

 “나는 우연히 생각하여 이 법을 깨달았으나, 옛날 사람이 이미 행하고 있던 일을 알지 못하였구나.” 하면서 한 번 웃었다. 인하여 그 일을 기록하였는데, 다른 날 갑작스러운 일에대응할 때 도움이 될 것이라고 여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