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14. 서울의 수비와 서순문제西巡問題

  • 관리자
  • 2021-07-04 오후 1:2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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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右相125) 이양원李陽元126)을 수성대장守城大將으로, 이전李戩․ 변언수邊彦琇를 경성

좌우위장京城左右衛將으로, 상산군商山君박충간朴忠侃을 경성순검사京城巡檢使로 삼아 도

성都城을 수비하게 하고, 김명원金命元127)을 기복起復하여 도원수都元帥로 삼아 한강漢

江128)을 지키게 하였다.

이때 이일李鎰이 패하였다는 보고서가 이미 이르렀으므로 인심이 흉흉하고, 궁중

에서는 서울을 옮기려는 의사가 있었으나 대궐 밖에서는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이마理馬129) 김응수金應壽가 빈청賓廳에 이르러 수상首相과 귀엣말로 소곤거리고 갔다

가 다시 오므로 보는 사람들이 이를 의심스럽게 생각하였는데, 이는 대개 수상이

그때 사복제조司僕提調130)의 일을 맡았던 까닭이었다.

도승지都承旨이항복李恒福131)이 손바닥에 ‘영강문永康門안에 말을 세워두라[立馬永

康門內]’는 여섯 글자를 써서 나에게 보였다. 대간臺諫이 “수상首相(이산해李山海)이

나랏일을 그르쳤다.”고 탄핵[劾]132)을 하며 파면시키기를 청하였으나, 임금께서는

허락하지 않았다. 종친宗親133)들이 합문閤門134) 밖에 모여 통곡하면서, “도성[城]을

버리지 말라.”고 청하였다. 영부사領府事김귀영金貴榮135)은 더욱 분격하여 여러 대

신들과 함께 들어가 임금을 뵈옵고 “서울을 굳게 지켜야 합니다.”고 청하고, 또 말

하기를,

“도성都城을 버리자는 의논을 주장하는 사람은 곧 소인小人입니다.”

라고 하였다. 임금께서 하교下敎하시기를,

“종묘사직[宗社]136)이 이곳에 있는데 내가 장차 어디로 간다는 말이냐?”

하니, 여러 사람들은 드디어 물러나갔다. 그러나 사세는 어찌할 수가 없었다.

이에 방리坊里137)의 백성들과 공사천인公私賤人138)들과 서리胥吏139)와 삼의사三醫司140)

사람들을 뽑아내어 성첩城堞을 나누어 지키게 하였으나, 성첩 3만여 곳으로 계산

이 되는데 성을 지키는 사람의 수는 겨우 7천명이고, 그것도 거의 다 오합지중[烏

合]141)이라서 다 성을 넘어서 도망갈 마음만 가졌다. 그리고 상번上番142)한 군사들

도 비록 병조兵曹에 소속되어 있으나, 하리下吏143)들과 함께 서로 농간질을 하여

뇌물을 받고 사사로이 놓아 보내는 사람이 많았는데, 관원들도 가거나 있거나 묻

지도 않으니, 위급한 일을 당하면 다 쓸 수 없는 군사들이었다. 군정軍政의 해이解

弛함이 이러한 지경에 이르렀었다.

대신大臣이 왕세자를 세워[建儲]144) 민심을 수습하자고 청하니, 임금께서는 그 뜻

을 따랐다.

동지사同知事이덕형李德馨145)을 왜군倭軍에 사자로 보냈다. 우리 군사가 상주尙州

싸움에서 패하고 후퇴할 때에 왜학통사倭學通事146) 경응순景應舜이라는 사람이 있어

이일李鎰의 군중軍中에 있다가 왜적에게 사로잡힌 바 되었는데, 왜장倭將평행장平行

長이 평수길平秀吉의 편지와 예조禮曹에 보내는 공문公文한 통을 경응순에게 주고

내어보내 주면서 말하기를,

“동래東萊에 있을 때 울산군수蔚山郡守를 사로잡아서 편지를 전해 보냈으나, 지금

에 이르기까지 회답을 받지 못하였다.(울산군수는 곧 이언성李彦誠인데, 그는 적의

진중으로부터 돌아왔으나 죄를 받을까 두려워하여 ‘스스로 도망하여 왔다.’고 말하

며 그 서류를 숨기고 전달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조정에서는 그 사실을 알지 못

하였다.) 조선朝鮮이 만약 강화講和147)하려는 뜻이 있으면 이덕형으로 하여금 오는

28일에 우리와 충주忠州에서 만나게 하는 것이 좋겠다.”

고 하였다. 대개 이덕형은 왕년에 일찍이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왜국의 사신을 접

대한 일이 있었기 때문에 소서행장小西行長이 그를 만나보려고 한 것이다. 경응순이

서울에 이르니, 이때 사세가 급해서 아무런 계교도 나오지 않으므로, 혹은 이것으

로 인해서 싸움을 늦출 수가 있을까 생각하였으며, 이덕형도 역시 스스로 가기를

청하므로, 예조禮曹로 하여금 답서를 마련하게 하여 경응순을 데리고 떠나갔다.(그

런데 이덕형은 중도에서 충주가 이미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먼저 경응순으로

하여금 가서 실정을 탐지하게 하였는데, 경응순은 적장 가등청정加藤淸正에게 잡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래서 이덕형은 드디어 중도에서 돌아왔는데, 평양平壤148)

에서 임금에게 이 사실을 복명復命하였다.

형혹熒惑149)이 남두南斗150)를 범하였다.

경기 ․ 강원 ․ 황해 ․ 평안 ․ 함경도 등의 군사를 징발하여 들어와 서울을 구원하게

하였다.

이조판서吏曹判書이원익李元翼151)을 평안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지사知事최흥원崔興源

을 황해도 도순찰사로 삼아 모두 그날로 출발시켜 보냈는데, 이는 장차 임금께서

서순西巡152)하시려고 하는 의논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원익은 일찍이 안

주목사安州牧使가 되고, 최흥원은 황해감사黃海監司가 되었는데, 모두 어진 정사를 베

풀어 백성들의 마음이 그들을 기뻐한 바 되었던 까닭으로 해서 먼저 그들을 가게

하여 군민軍民을 잘 어루만지고 타일러서 임금의 순행巡幸에 대비하게 한 것이다.

 

 

125) 右相: 우의정의 별칭. 조선조 때 관직으로 의정부에 속하였으며, 정원은 1명, 품계는 정 1품이었다.

126) 李陽元(1533~1592) : 조선조 선조 때의 영의정. 자는 백춘(伯春), 호는 노저(鷺渚), 본관은 전주(全

州).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서장관 ․ 삼도감사 ․ 형조판서 ․ 대제학 등을 거쳐 우의정이 되고, 임

진왜란 때 유도대장으로 공을 세워 영의정이 되었다. 철령으로 후퇴하여 있을 때 왕이 요동으로

건너갔다는 풍문을 듣고 7이간 먹지 않고 분사함.

127) 金命元(1534~1602) : 조선조 선조 때 문신. 자는 응순(應順), 호는 주은(酒隱),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경주(慶州). 명종 때 장원급제하여 좌참찬에 이르고, 임진왜란 때 팔도도원수로 활약하고

호 ․ 예 ․ 형 ․ 공조판서를 거쳐 영의정으로 지냈다.

128) 漢江: 우리나라 넷째 가는 큰 강. 길이 514킬로미터. 근원인 두 줄기가 태백산에서 나와 중부지

방을 횡단하여 서울 근방에서 합류하여 서해로 흐른다.

129) 理馬: 조선조 때 관직. 사복시(司僕寺)에 소속되어 임금이 타는 말에 관한 일을 맡아보았다. 정원

은 4명. 품계는 6품 이하였음

130) 司僕提調: 사복시는 조선조 대 궁중의 승여 ․ 마필 ․ 목장 등을 맡아보던 관청. 제조는 관청의 우두

머리가 아닌 사람에게 그 일을 다스리게 하던 벼슬로서, 종 1품 또는 정 2품의 품계를 가진 사

람이 맡았다. 정 1품 또는 정 2품의 품계를 가진 사람이 맡았다. 정 1품일 때는 도제조, 정 3품

의 당상관일 때는 부제조라 함

131) 李恒福(1556~1618) : 조선조 선조 때의 명상(名相). 자는 자상(子常), 호는 필운(弼雲) ․ 백사(白沙),

시호는 문충(文忠), 본관은 경주(慶州). 선조 때 문과에 급제, 호조참의(戶曹參議) ․ 승지를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도승지 ․ 형조판서로 활약하였고, 난후(亂後)에 우의정을 거쳐 영의정이 되었다.

광해군 때 북청으로 귀양가 적소에서 죽었는데, 􋺷백사집(白沙集)􋺸 ․ 􋺷북천일록(北遷日錄)􋺸 등의 저

서를 남겼다.

132) 劾: 탄핵을 말함. 잘못된 점을 들어 논죄(論罪)하며 책망하는 것

133) 宗親: 임금의 족속

134) 閤門: 임금이 평시에 거처하는 궁전. 곧 편전(便殿)의 앞문

135) 金貴榮(1520~1594) : 조선조 중기의 문신. 자는 현경(顯卿), 호는 동원(東園), 본관은 상주(尙州).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여러 요직을 거쳐 선조 때 우의정을 지냄. 임진왜란 때 임해군을 모시고

북도로 피란하였다가 회령에서 왕자와 함께 가등청정에게 잡혔다. 일본과의 화친문제를 말하다

가 임금의 노여움을 사서 희천으로 유배됨

136) 宗社: 종묘와 사직. 종묘는 역대왕의 신주를 모신 곳이고, 사직은 토지신과 곡신을 위한 곳

137) 坊里: 말단 행정구역. 지금 동리(洞里)와 같은 것

138) 公私賤人: 공천(公賤)과 사천(私賤). 공천은 조선조 때 관부에 종사하는 천인으로, 죄를 지어 종이

된 자와 관청 소속의 기생 ․ 나인 ․ 종 ․ 역졸 등으로 구성됨. 사천은 개인에게 소속된 천인을 말함

139) 胥吏: 중앙과 지방관청에 소속된 하급관리로, 일명 이서 ․ 이속 ․ 아전이라고 함

140) 三醫司: 조선조 때의 내의원 ․ 전의원 ․ 혜민서의 통칭

141) 烏合: 오합지중의 준말로, 쓸모없는 무리들만 모인 것을 말함

142) 上番: 지방의 군사를 뽑아 차례로 서울의 군영으로 올려보내는 일

143) 下吏: 지체가 낮은 이속들

144) 建儲: 왕세자를 세우는 것

145) 李德馨(1561~1613) : 조선조 중기의 명신. 자는 명보(明甫), 호는 한음(漢陰), 시호는 문익(文翼),

본관은 광주(廣州). 선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직제학 ․ 승지 ․ 대사간 ․ 대사성 ․ 이조참의를 거쳐 31

세에 예조참판 겸 대제학에 이름. 임진왜란 때 동지중추부사로 왜사(倭使)와 화의를 교섭하고,

임금을 피란시키고, 명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는 등 활약이 컸음. 4도체찰사를 거쳐 38세로 우

의정이 되었고, 뒤에 영의정을 지냄

146) 倭學通事: 일본말 통역

147) 講和: 화친의 의논하는 것

148) 平壤: 평안남도에 있는 지명. 우리나라의 역사적인 고도(古都)

149) 熒惑: 화성(火星)의 다른 이름

150) 南斗: 남방의 성수(星宿)의 이름

151) 李元翼(1547~1634) : 조선조 중기의 문신. 자는 공려(公勵), 호는 오리(梧里), 시호는 문충(文忠), 본

관은 전주(全州).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정언(正言) ․ 승지 ․ 대사헌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이조판서

로 평안도 도순찰사를 겸하고, 이어 우의정이 되어 4도도체찰사를 겸하고, 광해군 때 영의정이 됨

152) 西巡: 임금이 서쪽 지방으로 피란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