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71. 훈련도독訓練都督을 설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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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10-15 오후 1:2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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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사년(1593) 여름에 나는 병으로 서울[漢城]의 묵사동墨寺洞에 누워 있었는데,  하루는 명나라 장수 낙상지駱尙志가 내 누워 있는 곳을 방문하고 문병함이 매우 정성스러웠다.

이때 그는 말하기를,

“조선朝鮮은 지금 미약한데 왜적은 아직도 지경 안에 있으니, 군사를 훈련하여 적을 막는 일이 가장 급선무가 될 것 같습니다. 마땅히 명나라 군사가 아직 돌아가지 않은 이때를 타서 군사를 훈련하는 법을 배우고 익혀서 한 사람으로 열사람을 가르치고, 열 사람으로 백 사람을 가르친다면 몇 해 동안에 다 잘 훈련 된 군사가 되어 가히 나라를 지킬 만하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나는 그 말에 감동되어 곧 이 사실을 행재소行在所에 빨리 아뢰고, 인하여 데리고 있던 금군禁軍한사립韓士立으로 하여금 서울 안에 있는 군사를 불러 모아 70여명을 얻어 낙공駱公(낙상지駱尙志)이 있는 곳으로 가서 군사 훈련법을 가르쳐 줄 것을 청하니, 낙상지는 막하 사람으로서 진법陳法을 잘 아는 장육삼張六三등 10명을 뽑아 교사敎師로 삼아 밤낮으로 창검槍劍104) 낭선筤筅105) 등의 기술을 연습시켰다.

 얼마 뒤에 내가 남쪽 지방으로 내려가게 되자 그 일도 이내 그만두고 말았는데, 임금께서는 내 장계를 보시고 비변사備邊司에 분부하시어 따로 도감都監을 설치하여 군사를 훈련하도록 명령하시고, 정승 윤두수尹斗壽로 하여금 그 일을 맡아 다스리게 하였다.

 그해(1593) 9월에 나는 남쪽으로부터 행재소로 불려갔다가, 임금을 해주海州에서 맞이하여 모시고 서울로 돌아오는데, 연안延安에 이르러 다시 나에게 훈련도 감의일을 대신 맡아 다스리라고 분부하셨다.

 이때 서울에는 기근이 심하였으므로 나는 용산 창고[龍山倉]에 있는 중국좁쌀[宭栗未] 1천 석[石]을 내줄 것을 청하여 날마다 군사 한 사람에게 두 되[升]씩을 주었는데, 사람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도감당상都監堂上106) 조경趙儆은 곡식이 적어서 다 받아 줄 수 없었으므로, 법을 만들어이를 조절하려고 하여 큰 돌 하나를놓아두고 군사에 응모하기를 원하는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그 돌을 들게하여 힘을 시험하고 또 한 길쯤 되는 담장을 뛰어 넘어 보게 하여 할 수 있는 사람은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고, 할 수 없는 사람은 거절하니, 사람들이 굶주리고 피곤하여 기운이 없으므로 합격하는 사람이 10명에 한두 명 꼴이 되었고, 어떤 사람은 도감문都監門밖에서 시험을 보려다가 뜻대로 안 되어 쓰러져 죽기까지 하였다.

 얼마 안 되어 군사 수천 수백 명을 얻어서 파총把總․ 초관哨官을 세우고 부서를 나누어 거느리게 하였다. 또 조총鳥銃쓰는 법을 가르치려 하였으나 화약火藥이 없었다. 이때 군기시軍器侍에 장인匠人대풍손大豊孫이라는 자가 있었는데, 그는 적진으로 들어가서 많은 화약을 만들어 왜적에게 주었으므로, 강화도江華島에 가두어 장차 그를 죽이려고 하였다. 나는 특별히 그 죽음을 면하게 하여 주면서 대신 염초焰梢를 많이 구워 속죄하게 하였더니, 그 사람은 감격하고 두려워하여 이를 만드는데 힘을 다해 하루에 구워 내는 분량이 몇십 근이나 되었으므로 각 부서에 나눠주어 밤낮으로 총 쏘는 기술을 익히게 하고, 그 능하고 능하지 못한 것을 가려서 이를 상주고 벌주고 하였더니, 한 달 남짓하여 능히 날아가는 새를 맞히었고, 몇 달 뒤에는 항복한 왜적 및 남쪽 지방의 조총 잘 쏘는 사람과 서로 비교하여도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어떤 사람은 그보다 낫기도 하였다.

 나는 임금에게 차자[箚]를 올려 청하기를,

“군량을 조처하면서 더욱 군사를 모집하시어 1만 명이 차면 다섯 군영[五營]을설치하여 영마다 각각 2천명을 예속시키고, 해마다 그 반은 성안에 머물러

두어군법을 훈련시키고, 그 반은 성 밖에 내놓아 넓고 기름진 땅을 골라서 둔전屯田107)을 갈아 곡식을 저장하게 하시되, 이를 번갈아 대체한다면 몇 해 뒤에는 군사 식량의 근원이 튼튼하여지고, 나라의 근본도 굳건하여질 것입니다.”

 라고 청하였다. 임금께서는 그 의논을 조정에 내려보냈으나 병조兵曹는 이를 곧거행하지 않았으므로 마침내 효과를 보지 못하고 말았다.

 

 104) 槍劍: 창과 칼. 곧 보병의 무기

105) 筤筅: 일종으로 가지가 붙은 대자루로 된 창

106) 堂上: 조선조 때 관계(官階), 곧 당상관 동반(東班: 문관) 정3품 통정대부(通政大夫) 이상과 서반

(西班: 무관) 정3품 이상의 장군을 말함

107) 屯田: 조선조 때 전답을 군졸 ․ 평민들에게 개간시켜 거기서 나오는 수확물을 지방관청의 경비 또

는 군량과 국가 경비에 쓰도록 마련한 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