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53. 원균元均이 패하여 한산도 수군閑山島水軍이 무너짐

  • 관리자
  • 2021-09-10 오후 1:08: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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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 7일(선조宣祖30년, 1597)에 한산도閑山島수군이 무너지고, 통제사統制使원균

元均․ 전라우수사全羅右水使이억기李億祺가 사망하고, 경상우수사慶尙右水使배설輩楔61)은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이보다 먼저 원균은 이미 한산도에 이르렀었는데, 그는 이순신이 정하여 놓은

제도를 다 변경하고, 모든 장수와 군사들도 거의 이순신이 신임하여 부리던 사람

들은 다 내쫓아 버렸으며, 이영남李英男이 자기[元均]가 전날에 패하여 도망하였던

사실을 자세히 알고 있다고 해서 더욱 그를 미워하니, 군사들의 마음은 그를 원

망하고 분해하였다.

이순신이 한산도에 있을 때에 한 집을 지어 운주당運籌堂62)이라고 이름하고, 밤

낮을 그 안에서 지내면서 여러 장수들과 함께 전쟁에 대한 일을 의논하였는데,

비록 졸병이라 하더라도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하고자 하는 사람이면 와서 말하게

하여 군사적인 사정에 통하게 하였으며, 늘 싸움을 하려 할 때 장수들을 모두 불

러서 계교를 묻고 전략이 결정된 뒤에야 싸운 까닭으로 싸움에 패한 일이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원균은 좋아하는 첩을 데려다가 그 집[運籌堂]에서 살며 이중으로 울타

리를 하여 안팎을 막아 놓으니, 여러 장수들도 그의 낯을 보는 일이 드물었다. 그

는 또 술마시기를 좋아하여 날마다 술주정과 성내는 것을 일삼았고, 형벌이 법도

가 없었으므로 군중에서는 비밀리 수군거려 말하기를,

“만약 왜적을 만날 것 같으면 오직 도망하는 수가 있을 뿐이다.”

라고 하며, 여러 장수들은 몰래 서로 그를 비웃으며, 또한 다시 품의하거나 두

려하지도 않았으므로 호령이 행하여지지 않았다.

이럴 때 왜적의 군사가 다시 침구하였는데, 적장 평행장平行長(소서행장小西行長)은

또 요시라要時羅를 파견하여 김응서金應瑞를 속여 말하기를,

“왜선倭船이 아무 날에는 꼭 더 들어올 것이니 조선朝鮮의 수군은 아마도 중간에

서 맞아 쳐부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하였다. 도원수都元帥권율權慄은 더욱 그 말을 믿었고, 또 이순신이 머뭇거리다가

이미 죄를 받았으므로 해서 날마다 원균에게 군사를 거느리고 나아가서 치라고

재촉하였다. 원균도 항상 이순신이 왜적을 보고도 나아가 치지 않았다고 말하며

이것으로써 이순신을 모함하여 자기가 그 소임을 대신할 수 있었으니, 이에 이르

러 비록 그 형세가 어려운 줄 알면서도 부끄러워 거절할 도리가 없어서, 다만 전

함戰艦을 다 거느리고 앞으로 진격할 수밖에 없었다.

이때 언덕 위에 있는 왜적의 병영에서는 우리 배가 가는 것을 굽어보고는 서로

전하여 알리며 그 동정을 살피고 있었다. 원균이 절영도絶影島63)에 이르니 바람이

불고 물결이 일어나고 날은 벌써 저무는데 배는 머물러 정박할 곳이 없었다. 그

런데 왜적의 배가 바다 가운데 출몰하는 것이 바라보이자 원균은 여러 군사를 독

려하여 앞으로 진격하였는데, 배 안의 군사들은 한산도閑山島로부터 종일토록 노를

저어 오느라고 쉴 수도 없었고 또 굶주림과 목마름에 시달려 제대로 배를 운전할

수가 없었다. 여러 배들이 풍랑에 가로세로 밀려 드나들기도 하고, 잠깐 앞으로

나아갔다가는 곧 뒤로 밀려나가기도 하였다. 왜적들은 우리 군사를 피로하게 만들

려고 우리 배와 가까워졌다가는 문득 허둥지둥 피하여 달아나며 맞부딪쳐 싸우지

는 않았다. 밤이 깊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우리 배들은 사방으로 흩어져서 표류

하여 그 가는 방향도 알지 못하였다.

원균은 간신히 남은 배를 수습하여 거느리고 돌아와 가덕도加德島64)에 이르렀는

데, 군사들은 너무도 목이 말라서 다투어 배에서 내려 물을 마셨다. 그런데 왜적

의 배가 섬 속으로부터 튀어나와서 덮치므로 장병 4백여 명을 잃었다. 원균은 또

물러나와서 거제도의 칠천도漆川島에 이르렀다.

권율은 고성固城에 있었는데, 원균이 아무런 소득이 없다고 해서 격서[檄]를 보내

불러다가 곤장을 치고, 다시 진격하라고 독촉하였다. 원균은 군중으로 돌아와서는

더욱 분하고 화가 치밀어 술을 마시고 취하여 누워 버렸다. 여러 장수들이 원균

을 만나보고 군사에 관한 일을 말하려 하였으나 만나볼 수가 없었다.

이날 밤중에 왜적의 배가 와서 습격하여 우리 군사는 크게 무너졌다. 원균은

도망하여 바닷가에 이르러 배를 버리고 언덕으로 기어올라 달아나려고 하였으나,

몸집이 비둔하여 소나무 밑에 주저앉았는데 좌우 사람들은 다 흩어져 버렸다. 어

떤 사람은 그가 왜적에게 죽음을 당한 바 되었다고도 말하고, 어떤 사람은 그가

도망하여 죽음을 면하였다고도 말하는데, 그 사실을 확실하게 알 수는 없었다.

이억기李億祺는 배 위로부터 바닷물에 뛰어들어 죽었다.

배설裵楔은 이보다 먼저 여러번 원균에게 “이러다가는 반드시 해할 것이다.”고

간하였으며, 이날에도 또 “칠천도는 물이 얕고 협착해서 배를 부리기가 이롭지 못

하니 마땅히 진을 다른 곳에 옮겨 치는 것이 좋겠다.”고 간하였으나 원균은 다 들

어주지 않았다. 그래서 배설은 가만히 자기가 거느리고 있는 배와 약속하여 계엄

을 하고 사변을 기다리고 있다가, 왜적이 와서 침범하는 것을 보고는 항구를 벗

어나서 먼저 달아난 까닭으로 그 군사들은 홀로 온전하였다.

배설은 한산도閑山島로 돌아와서 불을 질러 병사兵舍와 양곡糧穀과 군기軍器를 태워

버리고, 남아 있던 백성들로써 섬 안에 있는 사람을 옮겨 왜적을 피하여 떠나가

게 하였다.

한산도가 패하고 나자, 왜적들은 이긴 기세를 타서 서쪽으로 향하여 쳐들어가니

남해南海․ 순천順天이 차례로 함몰되었다. 왜적의 배들은 두치진豆恥津에 이르러 육지

에 내려서 나아가 남원南原을 포위하니, 호남 ․ 호서[兩湖: 全羅道․ 忠淸道]지방이 크

게 진동하였다.

대개 왜적이 임진년(1592)에 우리나라 땅에 들어온 뒤로부터 오직 수군에게만

패하였으므로, 평수길平秀吉(풍신수길豐臣秀吉)은 이를 분하게 여겨 소서행장에게 반

드시 조선의 수군을 쳐부술 것을 책임지웠다. 이에 소서행장은 전략적으로 거짓

정성을 김응서金應瑞에게 보여 호감을 사는 한편 이순신李舜臣이 죄를 짓도록 만들

고, 또 원균元均을 꾀어 바다 가운데로 나오게 하여 그 허실虛實을 다 알고 나서

덮쳐 습격하였다. 그의 계략은 지극히 교묘하여 그 계획한 꾀에 모두 떨어지고

말았으니, 실로 슬프다.

 

 

61) 輩楔(?~1599) : 조선조 선조 때의 무장. 본관은 성주(星州). 정유재란 때 경상우수사로, 원균이 패한 뒤

에 이순신의 막하로 들어왔으나 명량해전(鳴梁海戰)을 앞두고 도망하였으므로 뒤에 잡혀 처벌됨

62) 運籌堂: 한산도의 제승당(制勝堂)에 있던 집으로,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왜적을 치기 위한 전

략을 마련하던 곳

63) 絶影島: 지금 부산 영도(影島)의 옛 이름

64) 加德島: 경상남도에 속한 섬. 부산과 거제도 사이에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