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51. 이순신李舜臣의 하옥下獄

  • 관리자
  • 2021-09-05 오전 9:3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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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군통제사水軍統制使이순신李舜臣을 옥에 가두었다.

이보다 먼저 원균元均은 이순신이 와서 구원해 준 것을 은덕으로 여겨서 서로

사이가 매우 좋았는데, 얼마 안 가서 공을 다투어 점차 잘 어울리지 않았다. 원균

은 성품이 험악하고 간사하며 또 중앙 ․ 지방[中外]의 인사들과 많이 연락하면서 이

순신을 모함하는데 여력을 남기지 않았으며, 늘 말하기를,

“이순신이 처음에는 우리를 구하러 오지 않는 것을 내가 굳이 청함으로 인하여

왔으니, 적을 이긴 것은 내가 수공首功(으뜸공)이 될 것이다.”

하였다. 이때 조정의 의논은 두 갈래로 나누어져서 저마다 주장하는 것이 달랐다.

이순신을 추천한 사람은 처음에 나였기 때문에 나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은 원

균과 어울려서 이순신을 공격하는 것이 매우 강력하였다. 오직 우상右相이원익李元

翼은 그것이 그렇지 않다는 것을 밝히고 또 말하기를,

“이순신과 원균은 제각기 나누어 지키는 지역이 있었으니, 처음에 곧 나아가 구

원하지 않았다 해도 족히 크게 잘못되었다고 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이보다 먼

저 왜적의 장수 평행장平行長(소서행장小西行長)은 자기의 졸개 요시라要時羅로 하여금

경상우병사慶尙右兵史김응서金應瑞의 진陳으로 왕래하게 하여 은근히 정을 통하고 있

었는데, 바야흐로 가등청정이 다시 출정하려고 하자, 요시라는 비밀리 김응서에게

말하기를,

“우리 장수 소서행장의 말이 ‘이번에 화의를 맺는 일이 이루어지지 못한 까닭은

가등청정의 잘못에 연유된 것이므로 나도 몹시 그를 미워한다.’고 하였습니다. 그

런데 아무 날에는 가등청정이 꼭 바다를 건너 올 것입니다. 조선朝鮮에서는 수전水

戰을 잘 하니 만약 바다 가운데서 맞아 친다면 틀림없이 쳐부수고 잡아죽일 수

있을 것이니 삼가 실패하지 말도록 하시오.”

하였다. 김응서는 그런 일을 상주하니 조정의 의논은 이것을 믿었다. 해평군海平君

윤근수尹根壽49)는 더욱 좋아 날뛰면서 이런 기회를 잃어버려서는 안 되겠다고 여겨

누차 이를 임금에게 아뢰고, 연달아 이순신에게 전진할 것을 재촉하였다. 그런데

이순신은 여기에는 왜적들의 간사한 속임수가 있는 것을 의심하여 나아가지 않고

머뭇거리기를 여러 날 동안 하였다. 이에 이르자 요시라는 또 와서 말하기를,

“가등청정이 지금 육지에 내렸는데, 조선에서는 어찌하여 막지 않았습니까?”

하면서 거짓으로 한탄하고 애석해 하는 뜻을 보였다.

이 사실이 알려지자 조정에서의 의논은 다 이순신을 잘못했다고 나무라고, 대간

臺諫은 그를 잡아올려 국문하자고 청하였고, 현풍玄風사람 박성朴惺50)이라는 자도

그때의 논의에 영합하여 상소문을 올려 이순신을 목베어야 옳겠다고 극단적으로

말하였다.

조정에서는 드디어 의금부도사義禁府都事를 파견하여 이순신을 잡아오고, 원균元均

을 대신 통제사統制使로 삼았다.

그러나 임금께서는 오히려 들리는 말이 다 진실이 아닌 것으로 의심하고, 성균

사성成均司成51) 남이신南以信52)을 파견하여 한산도[閑山]로 내려가서 사실을 조사하

고 살펴오게 하였다. 남이신이 전라도全羅道에 들어서자 군민君民들은 길을 막고 이

순신이 원통하게 잡혔다는 것을 호소했는데, 그런 사람의 수효를 헤아릴 수가 없

었다. 그러나 남이신은 사실대로 보고하지 아니하고 말하기를,

“가등청정이 해도海島에 머무르는 7일 동안에 우리 군사가 만약 나갔다고 할 것

같으며 가히 적장을 잡아올 수 있었겠사오나, 이순신은 머뭇거리고 나가지 않아서

그 기회를 놓쳐 버렸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순신이 옥에 이르자 임금께서는 대신에게 명하여 그 죄를 논의하게 하

였다. 이때 홀로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53) 정탁鄭琢54)이 간하기를,

“이순신은 명장名將이오니 죽여서는 아니됩니다. 군사상 기밀의 이해利害관계는

멀리서 헤아리기가 어려운 것입니다. 그가 싸우러 나아가지 않은 것에는 반드시

생각하는 점이 없지는 않았을 것이오니, 청하옵건데 너그럽게 용서하시어 뒷날에

공효를 이루도록 하시옵소서.”

하였다. 조정에서는 한 차례 고문拷問을 행한 후에 사형을 감하여 관직을 삭탈한

다음 군대에서 복무하도록 하였다.

이순신의 늙은 어머니는 아산牙山55)에 있었는데, 이순신이 옥에 갇혔다는 말을

듣고 근심으로 애를 태우다가 사망하였다. 이순신은 옥에서 나와 아산을 지나가는

길에 성복盛服56)하고는 곧 권율權慄의 막하로 가서 백의종군白衣從軍하였는데, 사람

들은 그 소식을 듣고 슬퍼하였다.

 

 

49) 尹根壽(1537~1617) :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자고(子固), 호는 월정(月汀), 시호는 문정(文

貞), 본관은 해평(海平).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의 아우다. 명종 때 문과에 급제, 대사성 ․

부제학 ․ 경기관찰사 ․ 이조참판을 거쳐 호조판서 ․ 예조판서 ․ 좌찬성 등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 판중

추부사 ․ 좌찬성으로 명나라 구원병 문제로 활약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의금부사에 임명됨

50) 朴惺(1549~1606) : 조선조 선조 때 사람. 자는 덕응(德應), 호는 대암(大菴), 본관은 밀양(密陽). 임

진왜란 때 초유사 김성일의 막하(幕下)에 있었고, 정유재란 때에는 체찰사 이원익의 막하에서 일

하다가 뒤에 안양현감을 지냈다.

51) 成均司成: 성균관에 속한 관직. 사성(司成)은 종 3품 벼슬

52) 南以信(1562~1608) : 조선조 선조 때 문신. 본관은 의령(宜寜). 문과에 급제, 벼슬이 대사간에 이름

53) 判中樞府事: 중추부는 조선조 때 중앙관청의 하나. 부사는 출납 ․ 병기 ․ 군정 ․ 숙위 ․ 경비 등의 일을

맡아보는 관직으로 정2품 벼슬

54) 鄭琢(1526~1605) : 조선조 선조 때의 대신. 자는 자정(子精), 호는 약포(藥圃), 시호는 정간(貞簡),

본관은 청주(淸州).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좌의정에 이름. 경사(經史) ․ 천문 ․ 지리 ․ 병서

등에 정통하고, 임진왜란 때 호종공신으로 서원부원군(西原府院君)에 피봉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