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2. 일본국사日本國使 의지義智 등이 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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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16 오전 9: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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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일본국사日本國使 의지義智 등이 옴
일본국사日本國使평의지平義智20)가 우리나라에 왔다. 풍신수길豐臣秀吉이 이미 귤강
광을 죽이고 의지義智로 하여금 우리나라에 가서 통신사通信使21)를 보내라고 요구하

게 했다. 의지義智란 사람은 그 나라의 주병대장主兵大將22) 평행장平行長23)의 사위로
서 풍신수길의 심복心腹이었다.
대마도對馬島태수太守종성장宗盛長은 대대로 대마도를 지키면서 우리나라를 섬겨
왔는데, 이때 풍신수길은 종씨宗氏를 제거하고는 의지義智로 하여금 대마도의 정무
를 대신하게 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바닷길을 알지 못한다는 것을 핑계로 해서
통신사通信使보내기를 거절하여 왔었는데, 풍신수길은 거짓으로 말하기를, “의지義
智는 곧 대마도주[島主]의 아들이므로 바닷길에 익숙하니 그와 함께 오라.”고 하여
우리나라로 하여금 핑계로 거절하는 일이 없게 하려고 하였고, 또한 우리나라의
허실虛實24)을 엿보려고 평조신平調信25) ․ 중 현소玄蘇26)등과 같이 왔다.
의지義智는 나이가 젊고 정력이 있고 사나와서 다른 왜인들이 다 두려워하였고,
그 앞에서는 엎드려 무릎으로 기며 감히 쳐다보지도 못하였다. 의지는 오랫동안
동평관東平館27)에 머물러 있으면서 반드시 우리 사신을 데리고 함께 돌아가겠다고
하였으나, 조정의 의논은 어떻게 결정을 짓지 못하고 머뭇거릴 따름이었다.
몇 해 전에 왜적이 전라도全羅道손죽도損竹島에 쳐들어와서 변장邊將이태원李太源
을 죽였는데, 그때에 사로잡힌 왜적이 “우리나라 변방 백성인 사을沙乙․ 배동背同이
란 자들이 배반하여 왜국 안으로 들어와 왜인들을 인도해서 침구[寇]하게 되었다.”
고 말하므로 조정에서는 분개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사람들이 혹은 말하기를,
“마땅히 일본으로 하여금 배반한 백성들은 조사하여 그들의 성의가 있느냐 없
느냐를 보아야 할 것이다.”고 하므로, 관객觀客으로 하여금 그 뜻을 빗대어 말하게
하였더니, 의지는 말하기를,
“이는 어렵지 않은 일이다.”
라고 하면서, 곧 평조신平調信으로 하여금 그날로 돌아가 이 사실을 알리게 하였
더니, 두어 달이 안 되어 우리나라 백성으로서 그 나라에 가 있는 사람 10여명을

모두 잡아가지고 와서 바쳤다. 이때 임금께서는 인정전仁政殿28)에 나아가 크게 군
사의 위엄을 보이고 사을沙乙․ 배동背同등을 묶어 뜰 안에 들여놓고 심문한 다음
성 밖에 끌어내어 베어 죽이고, 의지에게는 내구마內廐馬29) 한 필을 상주고, 그런
뒤에 왜국 사신 일행은 인견引見하고 잔치를 베풀어 주었다. 이때 의지와 현소 등
은 모두 대궐 안으로 들어와서 차례로 왕에게 술잔을 올렸다.
이때 나(이 책을 지은 류성룡柳成龍)는 예조판서禮曹判書로 있었으므로 역시 왜국
사신을 예조에 불러 잔치를 베풀었으나, 통신通信에 대한 의논은 그 후 오랫동안
결정을 짓지 못하였다. 내가 대제학大提學30)이 되어 장차 일본에 보낼 국서國書를
지으려 할 때 글을 올려, “이 일을 속히 결정하시어 두 나라 사이에 틈이 생기지
않도록 하소서”하고 청했고, 그 다음날 조강朝講31)에서 지사知事변협邊協32) 등도 또
한, “마땅히 사신을 파견하여 회답하게 하고, 또 저 나라 안의 동정도 살펴보고
오게 하는 것도 잘못된 계책은 아닐 것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이에 조정의 의논은 비로소 결정되었다. 그래서 임금께서는 사신으로 보낼 만한
사람을 선택하라고 명하였는데, 대신大臣이 첨지僉知황윤길黃允吉33)과 사성司成김성
일金誠一34)을 적임자로 아뢰어 상사上使와 부사副使로 삼고, 전적典籍허성許筬35)을 서
장관書狀官으로 삼았다.
이들은 경인년(선조宣祖23년, 1590) 3월에 드디어 의지 등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
다. 이때 의지는 공작孔雀두 마리와 조총鳥銃36)에 놓아 보내고, 조총은 군기시軍器
寺37)에 넣어두라고 명령하셨다. 우리나라가 조총을 가진 것은 이것이 처음이었다.

 

20) 平義智: 종의지(宗義智)를 이름. 대마도주 종성장(宗盛長)의 7대손으로 도주가 되었는데, 풍신수길
이 명하여 조선으로 왔었고, 임진왜란 때 소서행장(小西行長)과 함께 선봉으로 쳐들어왔다.
21) 通信使: 나라의 명을 받고 다른 나라로 왕래하는 외교사절

22) 主兵大將: 병마 군권을 주관하고 있는 대장
23) 平行長: 소서행장을 이름. 풍신의신(豐臣義臣)의 부하. 명장으로 임진왜란 때 가등청정(加藤淸正)
과 함께 왜군 최고 책임자의 한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쳐들어와서 온갖 만행을 자행하였다.
24) 虛實: 허허실실(虛虛實實)의 준말로 공허와 충실의 뜻
25) 平調信: 유천조신(柳川調信)을 이름. 임진왜란 직전에 풍신수길의 사자 종의지(宗義智)가 올 때 현
소와 함께 우리나라에 와서 허실을 살펴보고 갔으며, 난중에는 왜장의 막하에서 계략을 꾸민 자
26) 玄蘇: 임진왜란 때 중의 탈을 쓴 왜의 앞잡이
27) 東平館: 왜국 사신이 머무르던 숙소

28) 仁政殿: 창덕군의 정전
29) 內廐馬: 임금이 타는 수레와 말 등을 관장하는 내사복시(內司僕寺)에서 기르는 말
30) 大提學: 조선조 때 관직, 홍문관과 예문관에 속한 정 2품 벼슬
31) 朝講: 아침에 경연관(經筵官)이 왕에게 「경전(經傳)」을 강의하는 것
32) 邊協(1528~1590) : 조선조 선조 때의 장군. 자는 화중(和中), 호는 남호(南湖), 본관은 원주(原州).
무과에 급제하고 벼슬이 공조판서(工曹判書) 겸 도총관(都摠管), 포도대장에 이름
33) 黃允吉(1536~?) : 조선조 선조 때의 문관. 자는 길재(吉哉), 호는 우송당(右松堂), 본관은 장수(長
水). 황희(黃喜)의 5대손. 명종 때 문과에 급제. 선조 때 통신정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병화가 있을
것이라고 보고함. 벼슬이 병조참판에 이름
34) 金誠一(1538~1593) : 조선조 선조 때 문신. 자는 사순(士純), 호는 학봉(鶴峯), 본관은 의성(義城).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장령, 부제학을 지냄. 1590년 황윤길과 함께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와서
병화가 없을 것이라고 보고하여 말썽이 일어남. 임진왜란 때 순찰사를 지냄
35) 許筬(1548~1612) :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공언(功彦), 호는 악록(岳麓), 본관은 양천(陽川).
문과에 급제하여 1590년 통신사의 서장관으로 일본에 다녀왔고, 벼슬이 이조판서에 이름
36) 鳥銃: 무기의 일종으로 곧 소총

37) 軍器寺: 조선조 때의 관청. 병기(兵器) ․ 기치(旗幟) ․ 융복(戎服) ․ 집물(什物) 등을 만드는 일을 맡아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