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8.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다

  • 관리자
  • 2021-06-26 오전 10:3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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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조대곤曺大坤을 갈아 버리고, 임금의 특지特旨로 승지承旨88) 김성
일金誠一을 그 대신 임명하였다. 그런데 비변사備邊司에서 아뢰기를,
“성일은 유신儒臣입니다. 그는 이러한 때 변방의 장수로 소임을 맡기기에 적합하
지 않습니다.”
하였으나, 임금께서 윤허하지 않으므로, 김성일은 임금께 하직하고 임지로 떠났
다.
4월 3일에 왜병倭兵들이 국경을 침입하여 부산포釜山浦를 함락시켰는데, 이때 첨
사僉使정발鄭撥89)이 전사하였다.
이보다 먼저 왜국의 평조신平調臣․ 현소玄蘇등이 통신사通信使와 함께 와서 동평관
東平館에 묵고 있었는데, 비변사備邊司에서는 임금께 “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등으

로 하여금 사사로이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가지고 가서 그들을 위로하는 체하면
서 조용히 그 나라 형편을 물어 그 정세를 살핀 다음에 방비할 대책을 마련하자.”
고 청하니 이를 허락하였다.
김성일 등이 동평관에 이르니, 현소玄蘇는 과연 비밀히 말하기를, “중국中國이 오
랫동안 일본日本과의 국교를 끊고 조공을 바치지 않으므로, 평수길平秀吉은 이것을
마음 속에 품어 분하고 부끄럽게 여겨서 전쟁을 일으키려고 합니다. 조선朝鮮이 먼
저 이 사정을 중국에 알려서 조공하는 길이 트이게끔 주선한다면 반드시 아무 일
도 없을 것이며, 일본 66주州의 백성들도 역시 전쟁의 수고로움을 면하게 될 것입
니다.”
라고 하였다. 김성일 등은 대의大義로써 이를 책망하고 타일렀는데, 현소는 말하
기를,
“옛날에 고려高麗는 원元나라의 군사를 인도하여 일본을 쳤습니다. 일본이 이로 인한 원
한을 조선에 갚으려 하는 것은 그 사세가 마땅할 것입니다.”
하면서 그 말이 점점 거칠어졌다. 이로부터 두 번 다시 찾아가서 물어보지도
않았다. 그리고 조신調信․ 현소도 스스로 돌아가고 말았다.
신묘년(1591) 여름에 평의지平義智가 또 부산포에 와서 변장邊將에게 말하기를,
“일본은 명나라와 국교를 통하고자 하는데, 만약 조선이 이를 위하여 그 뜻을 알려주면
아주 다행하겠으나, 그렇지 않으면 두 나라는 장차 화기和氣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큰 일인 까닭에 와서 알려 드립니다.”
라고 하였다. 변장邊將이 이 사실을 알렸으나, 이때 조정의 의논은 마침 일본에
통신사를 보낸 것이 잘못이라고 나무라고, 또 그들의 거칠고 거만한 것을 노여워
하여 회보하지 않으니, 의지義智는 10여일 동안이나 배를 머물러 두고 기다리고
있다가 그만 앙심을 품고 돌아가 버렸다. 이 뒤로 왜인들이 다시 오지 아니하였
고, 부산포의 왜관에 항상 머물러 있던 왜인 수십 명도 차츰차츰 돌아가 버리고,
왜관 전부가 거의 비어 있다시피 하니 사람들은 이를 괴상하게 여겼다.
이날(4월 13일) 왜적의 배가 대마도對馬島로부터 온 바다를 덮고 건너오는데, 이
를 바라보아도 그 끝이 보이지 않았다.
부산포 첨사 정발鄭撥은 절영도絶影島90)로 나아가 사냥을 하다가 왜적이 쳐들어오

는 것을 보고 허둥지둥 성으로 달려 들어왔는데, 왜병倭兵이 뒤따라 와서 상륙하여

사방에서 구름같이 모여들어 삽시간에 부산성이 함락되었다.

 

 

88) 承旨: 조선조 때 관직. 승정원에 소속되어 왕명의 출납을 맡아 보았는데, 정 3품의 당상관 벼슬로
정원은 6명임
89) 鄭撥(1533~1592) : 조선조 때의 장군. 자는 자고(子固), 호는 백운(白雲), 시호는 충장(忠壯), 본관은 경
주(慶州). 25세 때 무과에 급제하여 선전관으로 뽑혔고, 임진왜란 때 부산진 첨사로 있다가 전사함

90) 絶影島: 지금 부산의 영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