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7. 신립장군申砬將軍의 사람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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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6-24 오전 9:06: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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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년(1592) 봄에 왕은 신립申砬과 이일李鎰을 나누어 보내 변방의 군비 상태를
순시하게 하였다. 이일은 충청忠淸․ 전라도全羅道로 가고 신립은 경기京畿․ 황해도黃海

道로 갔다가 다 한 달이 지난 뒤에 돌아왔는데, 점검點檢한 것들이란 활 ․ 화살 ․ 창 ․
칼 따위 뿐이었고, 군읍郡邑에서는 모두들 문서의 형식만 갖춘 것을 가지고 법망을
피하며 달리 방어에 대한 좋은 계책을 마련한 것이 없었다.
신립申砬은 평소에 잔인하고 포악하다는 평판이 있는 사람인데, 이르는 곳마다 사람들을
죽여 그 위엄을 세우니 수령守令82)들이 그를 무서워해서 백성을 동원하여 길을 닦고, 대
접하는 음식이나 거처하는 숙소가 지극히 사치스러워 비록 대신大臣83)의 행차라 하더라도
이만 같지 못할 형편이었다.
그들이 이미 임금에게 복명復命한 뒤, 4월 1일에 신립이 우리 집으로 나를 찾아
왔기에, 나는 묻기를,
“머지않아서 변란이 있을 것 같다. 그때는 공公이 마땅히 이 일을 맡아야 할 것
인데, 공의 생각으로는 오늘날 적의 형세를 보아서 이를 방어하기 어렵겠소, 아니
면 어떠할 것 같소?”
하였더니, 산입은 아주 적을 가볍게 보면서 근심할 것이 없을 것이라 여기고
있었다. 나는 말하기를,
“그렇지 않으리라. 지난날에 왜인들은 다만 짧은 창칼 따위만 믿는 처지였지만,
오늘날에는 조총鳥銃과 같은 무기를 다루는 장기長技까지 가지고 있으니 가볍게 보
아서는 안되오.”
하니, 산입은 말하기를,
“비록 조총鳥銃을 가졌다 하더라도 어찌 쏘는 대로 다 맞힐 수 있겠습니까?”
하므로, 나는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태평세월을 누린 지 오래 되었으므로 군사들이 겁쟁이고 약해서, 과연 위
급한 일이 있으면 적에게 항거하기가 아주 어려울 것 같으오. 내 생각으로는 수년 후에
사람들이 자못 군사 일에 익숙하여지면 혹은 난리를 수습하게 될지 알 수 없으나, 지금
같아서는 매우 근심스럽소.”
라고 하였으나, 신립은 도무지 깨닫지 못하고 가버렸다.
대개 신립申砬은 계미년(1583)에 온성부사穩城府使84)가 되었다. 그때 배반한 오랑

캐들이 종성鐘城85)을 포위하므로 신립이 달려가서 이를 구원하였는데, 그가 10여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돌격하니 오랑캐들이 포위를 풀고 물러가 버렸다. 조정에서
는 신립이 대장의 소임을 감당할 만한 재능이 있다고 하여 북병사北兵使․ 평안병사
平安兵使로 승진시키고 얼마 안 되어 자헌資憲86)에 올리어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삼고자
하는 형편에까지 이르니, 바야흐로 그 의기가 충천하여 바로 조괄趙括87)이 진秦나
라를 업신여기던 것과 같이 조금도 일에 임하여 두려워하는 기색이 없으므로, 사

리를 아는 사람은 그의 행동을 매우 근심하였다.

 

82) 守令: 조선조 때 각 고을을 맡아 다스리던 지방관의 총칭. 곧 원님
83) 大臣: 재신과 같은 뜻의 말로, 중앙 관청의 정승 ․ 판서와 같이 임금을 보좌하며 국정을 다스리던

높은 벼슬아치의 총칭

84) 穩城府使: 조선조 때 지방관으로 도호부사(都護府使)는 종 3품 벼슬.
85) 鐘城: 함경북도 두만강변에 위치한 지명으로 군사적 요지. 조선조 초 세종 때 김종서(金宗瑞)가
개척한 6진의 하나로, 세종 때 도호부를 둔 곳임.
86) 資憲: 조선조 때 관계인 자헌대부(資憲大夫)를 말함. 국초부터 정 2품인 동반[문관] 및 서반[무관]
에게 주었으나, 말기에는 종친(宗親) 의빈(儀賓)에게도 이 관계를 주었다.
87) 趙括: 옛날 중국 전국시대 조(趙)나라의 장수로, 병법을 좀 안다고 진(秦)나라를 업신여기다가 크

게 패하여 남의 지탄을 받은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