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6. 이순신李舜臣의 발탁

  • 관리자
  • 2021-06-23 오전 9:48: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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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읍현감井邑縣監59) 이순신李舜臣60)을 발탁하여 전라좌도全羅左道수군절도사水軍節度
使61)로 삼았다. 이순신은 담력과 지략이 있고 말을 잘 타고 활을 잘 쏘았다.

그는 일찍이 조산만호造山萬戶62)가 되었는데, 이때 북쪽 변방에는 사변이 많았다.

이순신은 좋은 계교로써 배반한 오랑캐 우을기내于乙其乃를 유인하여 와서 병영兵營으로

묶어 보내어 베어 죽이니 드디어 오랑캐의 근심이 없어졌다.
순찰사巡察使63) 정언신鄭彦信64)은 이순신으로 하여금 녹둔도鹿屯島65)의 둔전屯田66)
을 지키게 하였다. 하루는 크게 안개가 끼었는데, 군인들은 다 벼를 거두러 나가
고 목책木柵67)안에는 다만 군인 10여명만이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오랑캐의 기병
들이 사방에서 모여들었다. 이순신은 목책의 문을 닫고서 스스로 유엽전柳葉箭68)을
목책 안에서 연달아 쏘아 적 수십명이 말에서 떨어져 죽으니 오랑캐들은 크게 놀
라서 도망하였다. 이순신은 문을 열고 혼자서 말을 타고 크게 소리를 지르며 쫓
아가니 오랑캐들은 크게 패하여 달아났다. 이에 약탈된 재물을 다 빼앗아 가지고
돌아왔다. 그런데 조정에서 그를 추천하여 주는 사람이 없어서, 무과과거에 급제
한 지 10여년이 되도록 승진이 되지 못하고 있다가 비로소 정읍현감이 되었다.
이 때 왜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리가 날로 심하게 전해지자 임금께서는 비변사備
邊司69)에 명하여 각각 재모가 장수감이 될 만한 사람을 추천하라고 하므로, 내가
이순신을 추천하여 드디어 정읍현감으로부터 수사水使로 뛰어 임명되나, 사람들은
혹은 그가 갑작스레 승진한 것을 의아하게 여기기도 하였다.
당시 조정에 있는 무장武將가운데서는 오직 신립申砬70) ․ 이일李鎰71)이 가장 유명하였
다.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72) 조대곤曺大坤은 나이도 늙고 용맹도 없으므로 여러 사람들은

그가 군사의 전권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고 근심하였다. 나(류성룡)는 경연經筵73)에서
임금에게 아뢰어 이일로 조대곤을 대신하게 할 것을 청하니, 병조판서兵曹判書74) 홍여순洪
汝諄75)이 말하기를,
“유명한 장수는 마땅히 서울에 남아 있어야 합니다. 이일을 파견하여서는 안됩니다.”
하였다. 나는 거듭 아뢰어 말하기를,
“모든 일은 미리 준비하는 것이 소중합니다. 더구나 군사를 다스려 적을 막는
일은 더욱 갑자기 마련해서는 안됩니다. 하루 아침에 사변이 생기면 마침내 이 일
을 파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오니, 이왕 보낼 바에는 차라리 하루라도 일찍 보
내어 미리 군사를 정비하고 변고를 대비하게 하는 것이 매우 이로울 것입니다. 그
렇지 않고 갑작스럽게 다른 고을에 있던 장수를 급히 내려보낸다면 거의 그 도道
의 형세를 알지 못할 것이고, 또 그 군사들의 용감함과 비겁함도 알지 못할 것이
오, 이는 병가兵家76)의 꺼리는 것이므로 이러다가는 반드시 후회가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였으나 임금께서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으셨다.
나는 또 비변사備邊司에 나와서 여러 사람들과 의논하여 조종祖宗때에 마련한 진
관鎭管의 법法77)을 시행하자고 계청하였다. 그 내용은 대략 이러하였다.
“우리나라의 건국 초기에는 각도의 군사들을 다 진관鎭管에 나누어 붙여서 사변
이 있으면 진관에서는 그 소속된 고을을 통솔하여 인차鱗次78)로 정돈하고 주장主將
의 호령을 기다렸습니다. 경상도慶尙道를 말한다면 김해金海․ 대구大丘․ 상주尙州․ 경주
慶州․ 안동安東․ 진주晉州가 곧 여섯 진관鎭管이 되어서 설사 적병이 쳐들어와서 한
진鎭의 군사가 비록 실패한다 하더라도 다른 진이 차례로 군사를 엄중히 단속하여
굳건히 지켰기 때문에 한꺼번에 다 허물어져 버리는데 이르지는 않았습니다. 저
지난 을묘년(1555)의 왜변이 있은 뒤에 김수문金秀文79)이 전라도에 있으면서 처음

으로 분군법分軍法을 고쳐 만들어 도내의 여러 고을을 갈라서 소속한 군사를 순변
사巡邊使80) ․ 수사水使에게 나누어 붙이고 이름하기를 ‘제승방략制勝方略81)이라고 하였
는데, 여러 도道에서도 다 이를 본받아 군사를 정비하였던 것입니다. 이에 있어서
진관鎭管의 명칭만은 비록 남아 있었사오나 그러나 그 실상은 서로 잘 연결이 되
지 않았으므로, 한 번 경급警急을 알리는 일이 있으면 반드시 멀고 가까운 곳이
함께 움직이게 되어 장수가 없는 군사들로 하여금 먼저 들판 가운데 모여 장수
오기를 천리 밖에서 기다리게 하다가 장수가 제때에 오지 않고 적의 선봉이 가까
워지면 군사들이 마음속으로 놀라고 두려워하게 되니 이는 반드시 무너지는 도리
입니다. 대중이 한번 무너지면 다시 수습하기가 어려운 것인데, 이때에는 장수가
비록 온다고 하더라도 누구와 함께 싸움을 하겠습니까? 그러하오니 다시 조종祖宗
때 마련한 진관鎭管의 제도를 수복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이렇게 하면 평상
시에는 훈련하는 데 쉽고 사변이 있을 때면 순조롭게 군사를 모을 수 있을 것이
며, 또 전후를 서로 호응하게 만들고 안팎이 서로 의지하게 되어 갑자기 무너져
서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 않게 될 것이오니, 이변에 대처하는 데 편리할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일에 관하여 본도本道에 하달하였더니 경상감사 김수金晬는 “제승방략制勝方略은
써 온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니 갑자기 변경할 수 없습니다.”하므로, 그 의론은 드

디어 중지되고 말았다.

 

59) 井邑縣監: 현(縣)에 두었던 원님 벼슬. 지방장관으로는 가장 낮은 벼슬로서, 현령은 종 5품, 현감
은 종 6품이었다.
60) 李舜臣(1545~1598) : 조선조 선조 때의 명장. 자는 여해(汝諧), 시호는 충무(忠武), 본관은 덕수(德
水). 선조 9년에 무과에 급제, 조산만호 ․ 정읍현감 ․ 전라좌도수군절도사를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왜적을 크게 무찔러 나라를 구함. 정유재란 때 노량해전에 적을 섬멸시키다가
전사함. 선무공신 1등에 충무(忠武)라는 시호를 받음 􋺷충무공전서􋺸가 있음
61) 全羅左道水軍節度使: 조선조 때 전라좌도에 있는 수군의 진수부(鎭守府)인 수영(水營)에 딸린 정
3품의 무관 이름
62) 造山萬戶: 무관의 하나. 만호 ․ 천호 ․ 백호 등은 본래 그 관령하는 민호의 수를 말하는 것으로, 고

려 때부터 마련된 벼슬이었다.

63) 巡察使 : 조선조 때 지방장관인 관찰사가 난시(亂時)에 겸한 관직으로 종 2품 벼슬로 임명함
64) 鄭彦信(1527~1591) : 조선조 선조 때 문신. 자는 입부(立夫), 호는 나암(懶菴), 본관은 동래(東來).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우부승지 ․ 함경도절제사 ․ 우찬성 ․ 순찰사 ․ 우의정 등의 벼슬을 지냄
65) 鹿屯島: 함경북도에 있는 지명
66) 屯田: 조선조 때의 전제(田制)로 관둔전과 군둔전의 하나. 전자는 지방관청의 경비에 쓰고, 후자는
주둔군의 군량과 경비에 씀
67) 木柵: 나무로 울타리를 만들어 적을 방어하는 작은 성책(城柵)
68) 柳葉箭: 살촉이 버들잎 모양으로 된 화살
69) 備邊司: 조선조 때 군국기무를 총령하는 관청, 비국(備局) 또는 주사(籌司)라고도 함. 도제조 ․ 제조
등의 관원을 둠. 삼포 왜란 때 창설되어 을묘왜란 때 상설 군사기구로 되고, 임진왜란 때에는 전
시의 군사 ․ 정치의 통할 기구로 됨
70) 申砬(1546~1592) : 조선조 선조 때의 장군. 자는 입지(立之), 시호는 충장(忠壯).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하여 진주판관 ․ 온성부사 ․ 평안도병마절도사 등을 거쳐 한성판윤이 되고,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도순변사가 되었는데, 충주 탄금대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함
71) 李鎰(1548~1601) : 조선조 선조 때의 무장(武將). 자는 중경(重卿), 시호는 장양(壯襄), 본관은 평산
(平山). 명종 때 무과에 급제, 경원부사를 지내고 임진왜란 때 순변사로 활약함
72) 慶尙右兵使: 조선조 대 무관직. 속칭 병마절도사. 지방의 군대를 통솔한 책임자로 종 2품 벼슬.
정원은 15명으로 경기 1, 충정 2, 경상 3, 전라 2, 황해 2, 가원 1, 함경 3, 평안도 2명이 있고,

그중에 1명은 관찰사를 겸임하였다.

73) 經筵: 임금 앞에 경전을 강론하는 자리
74) 兵曹判書: 조선조 때 6조의 으뜸 벼슬로 정 2품
75) 洪汝諄(?~1609) : 조선조 때의 문신. 자는 사신(士信), 본관은 남양(南陽). 선조 때 문과에 급제, 병
조판서를 거쳐 임진왜란 때에는 호조판서를 지내고, 순찰사 ․ 지중추부사 등을 역임함
76) 兵家: 병학을 연구하는 사람, 또는 그 학파
77) 鎭管의 法: 조선조 때의 지방 군사조직으로, 각 도의 군사를 진관에 분속시키고, 유사시에는 진관

의 주장이 이를 지휘하여 방위에 임하게 하는 제도이다.
78) 鱗次: 고기의 비늘처럼 차례차례로 정돈한다는 뜻.

79) 金秀文(?~1568) : 조선조 명종 때 무장. 자는 성장(成章), 본관은 고령(高靈). 중종 때 무과에 급제,
명종 을묘왜변(1555)때 제주목사로 적을 쳐 공을 세우고, 한성판윤을 거쳐 평안도병마절도사로 북
변 방위에 공이 많았다.
80) 巡邊使: 조선조 때 왕명으로 군무의 책임을 띠고 변방을 순검하는 목사로, 대개 유사시에 임명하

는 임시 겸직
81) 制勝方略: 조선조 문종 때 김종서가 함경도 8진의 방수(防戍)를 논한 병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