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조정에서는 왜국의 움직임을 근심하여 변방을 수비하는 일에 밝은 재신들
을 가려서 하삼도下三道53)를 순찰하여 이에 대비하게 하였는데, 김수金睟54)를 경상
감사慶尙監司55)로, 이광李洸56)을 전라감사全羅監司로, 윤선각尹先覺을 충청감사忠淸監司로
삼아 기계器械를 갖추고, 성지城池를 수축하게 하였다. 그 중에서도 경상도에서는
성을 쌓은 것이 더욱 많아서 영천永川․ 청도淸道․ 삼가三嘉․ 대구大丘․ 성주星州․ 부산釜
山․ 동래東萊․ 진주晉州․ 안동安東․ 상주尙州의 좌우병영左右兵營과 같은 것은 새로 쌓기
도 하고 혹은 증축하기도 하였다.
이때는 세상이 태평스러운 지가 이미 오래 되었으므로, 중앙과 지방이 다 편안
한 데 젖어서 백성들은 성 쌓는 일 같은 노역을 꺼리게 되고 원망하는 소리가 길
에 가득찼다. 나와 같은 연배인 전 전적典籍이노李魯는 합천陜川사람인데, 그는 나
에게 서신을 보내 말하기를,
“성을 쌓는 것은 좋은 계교가 아닙니다.”
하고, 또 말하기를,
“삼가三嘉는 앞에 정진鼎津이 가로막혀 있으니 왜적들이 날아서 건너오겠습니까?
애써 쓸데없이 성을 쌓느라고 백성을 수고롭게 만드리오?”
라고 하였다. 대저 만리 창해로서도 오히려 왜적을 막을 수가 없었는데 조그마
한 강물 하나를 가로놓고 반드시 왜적이 건너올 수 없을 것이라고 단정하니, 그
사람 역시 사리에 어두운 것이라 하겠으나, 이때 사람들의 의논은 다 이와 같았
다. 홍문관弘文館57)에서도 또한 차자箚子58)를 올려 그렇게 논란하였다.
그런데 경상도와 전라도의 두 도내에 쌓은 성들은 다 그 지형과 형세를 잘 살
펴서 쌓지 않고 넓고 크게 하여 많은 사람들을 수용할 수 있게 만드는 데에만 힘
썼다. 진주성晉州城같은 것은 본래 험한 곳에 의거하여 지킬 만하였으나, 이때에
이르러 그것이 작다고 여겨서 동면東面의 평지로 내려 쌓았기 때문에, 그 뒤에 적
들이 여기로부터 성안으로 들어와서 성을 보전하지 못했다.
대체로 성이란 견고하고 작은 것을 고귀하게 여기는 것인데, 오히려 그것이 넓지
않다고 염려를 하였으니, 역시 그때의 의논이 그러하였던 것이다.
더구나 군정軍政의 근본 문제라든지 장수를 가리는 요긴한 점이라든지, 군사를
편성하고 훈련하는 방법에 이르러서는 백 가지 중에서 한 가지도 제대로 갖추지
못하였으므로 전쟁에 패하는 데에 이르고 말았다.
53) 下三道: 아랫녘의 삼도, 곧 충청도 ․ 경상도 ․ 전라도
54) 金睟(1547~1615) : 조선조 선조 때 문신. 자는 자앙(子昻), 호는 몽촌(夢村), 본관은 안동(安東). 선
조 때 문과에 급제하여 경상감사 ․ 호조판서 ․ 영중추부사 등의 벼슬을 지냄
55) 慶尙監司: 조선조 때 지방장관. 8도에 1명씩 두었는데 종 2품 벼슬로서, 관찰사 ․ 관찰출척사(觀察
黜陟使)라고도 이름하였다. 문관직으로서 절도사 ․ 수도절도사 등의 무관을 겸하고 있었다.
56) 李洸(1541~1607) :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사무(士武), 호는 우계(雨溪), 본관은 덕수(德水).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 때 전라감사가 되어 충청감사 윤선각(尹先覺), 경상감사 김수 등
과 더불어 용인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대패하였다.
57) 弘文館: 조선조 때의 삼사(三司: 사헌부 ․ 사간원 ․ 홍문관)의 하나. 주로 궁중의 경서 및 사적을 관
리하며 문서를 처리하고, 또 임금의 자문에 응하는 관청이다.
58) 箚子: 상소문의 간략한 형식으로 신하가 임금에게 올리는 문서의 한 체를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