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묘년(선조宣祖24년, 1591) 봄에 통신사通信使황윤길黃允吉․ 김성일金誠一등이 일본에
서 돌아왔는데, 왜인倭人평조신平調信․ 현소玄蘇가 함께 따라 왔다.
이보다 먼저 지난해(1590) 4월 29일에 부산포釜山浦38)로부터 배를 타고 대마도對
馬島에 이르러 한 달 동안 머무르고, 또 대마도로부터 뱃길로 40여 리를 가서 일
기도一岐島에 이르고, 박다주博多州․ 장문주長門州․ 낭고야浪古耶39)를 거쳐 7월 22일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그 국도國都40)에 도착하였다. 대개 왜인들이 고의로 그 길을
멀리 돌고 또 곳곳에 머물러 지체케 한 까닭으로 여러 달 만에 이르게 된 것이
다.
그들이 대마도에 머물러 있을 때 평의지平義智가 사신을 청하여 절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사신들이 이미 자리에 앉아 있는데, 의지가 교자[轎]를 탄 채로 문 안으
로 들어와 섬돌에 이르러서야 내렸다. 이를 본 김성일이 노하여 말하기를,
“대마도는 곧 우리나라의 번신藩臣41)이다. 사신이 왕명을 받들고 왔는데, 어찌
감히 오만하게 업신여김이 이와 같으냐? 나는 이런 잔치를 받을 수 없다.”
하고는 곧 일어나서 나오니 허성許筬등도 잇따라 나와 버렸다. 그러자 의지는
그 허물을 교자를 메고 온 사람에게 돌려 그 사람을 죽여서 그 머리를 받들고 와
서 사과하였다. 이로부터 왜인들은 김성일을 공경하고 두려워하여 그를 대접함에
예를 더 극진히 하며 멀리 바라보이기만 해도 말에서 내렸다. 우리 사신들이 그
나라에 이르니 큰 절에 묵게 하였다. 때마침 평수길(풍신수길)이 동산도東山道를 치
러 갔으므로 두어 달 동안 머물러 있었는데, 수길이가 돌아오고도 또 궁실宮室을
수리한다는 핑계로 즉시 국서國書를 받지 않아서 전후 다섯 달 동안이나 머물러
있다가 비로소 왕명을 전달하였다.
그 나라에서도 천황天皇42)을 매우 높여서 수길로부터 이하의 모든 관리가 다 신
하의 예로써 이에 처하였고, 수길은 나라 안에 있을 땐 왕이라 칭하지 않고 다만
관백關白43)이라고 칭하였고, 혹은 박륙후博陸候44)라고 칭하였다. 이른바 관백이라는
말은 곽광藿光45)이 말한, ‘모든 일은 다 먼저 자기에게 관백하라[凡事皆關白光]’는
말에서 따온 것이다.
풍신수길은 우리 사신을 접대할 때에 교자를 타고 그 궁宮으로 들어가는 것을
허락하며, 날라리를 불며 앞에서 인도하여 당堂에 올라서 예禮를 행하게 하였다.
풍신수길은 얼굴은 작고 누추하고 낯빛은 검으며 보통 사람과 다른 의표는 없으
나, 다만 눈빛이 좀 번쩍거려 사람을 쏘아보는 것 같이 느껴졌다고 한다. 그는 삼
중석三重席을 깔고 남쪽으로 향하여 마루에 앉았고, 사모紗帽를 쓰고 검은 도포를
입었으며 신하들 몇 사람이 옆에 벌여 앉았다가 우리 사신을 인도하여 자리에 앉
게 하였다. 자리에는 연회의 기구도 설비하지 않았고 앞에는 한 개의 탁자가 놓
였는데, 그 가운데에 떡 한 그릇이 놓여 있었으며, 질그릇 사발로써 술을 따랐는
데 술 역시 탁주였으며, 그 예禮가 극히 간단하여 두어 번 술잔을 돌리고는 그만
두니, 절하고 읍揖하고 술잔을 주고받고 하는 절차가 없었다. 잠시 후에 수길은
갑자기 일어나서 집안으로 들어갔는데 자리에 앉아있던 사람은 모두 움직이지 않
았다. 조금 뒤에 한 사람이 편복便服46)으로 어린애를 안고 집안으로부터 나와서
집안을 배회하므로 이를 바라보니 곧 수길이었다.
이때 자리에 앉아 있던 사람은 모두 고개를 숙이고 엎드려 있을 따름이었다.
이윽고 난간 밖에 나와서 우리나라 악공樂工을 불러 여러 가지 풍악을 성대히 연
주하게 하고 이를 듣고 있는데, 안고 있던 어린애가 그 옷에 오줌을 누었다. 수길
은 웃으면서 시자侍者를 부르니 한 여왜女倭가 그 소리에 응하여 달려나와 그 아이
를 받아 다른 옷으로 갈아 입혔다. 그의 모든 행동은 제멋대로 였으며 마치
그곁에는 사람이 없는 것 같은 태도였다.
사신들이 하직하고 나온 후에는 다시 수길을 볼 수 없었는데, 상사上使와 부사副
使에게는 선물로 은銀4백냥을 주고, 서장관書狀官․ 통사通事이하 수행원에게는 차를
주었다.
우리 사신이 장차 돌아오려 할 때, 곧 답서를 마련하지 않고 먼저 떠나라고 하
였다. 김성일이 말하기를,
“우리는 사신이 되어 국서國書를 받들고 왔는데, 만약 회보하는 글이 없다면 이
것은 왕명을 풀밭에 버리는 것과 같은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런데 황윤길은 더 머물라는 말이 나올까 두려워 갑자기 떠나
배가 머물러 있는 바닷가에 이르러 기다리고 있으니 그제야 답서가 왔다. 그러나
그 글 내용이 거칠고 거만하여 우리가 바라던 것이 아니었다. 김성일은 이를 받
지 않고 몇 차례를 고쳐 써오게 한 연후에야 가지고 떠났다. 사신이 지나는 곳마
다 여러 왜인들이 선물을 주었으나 김성일은 이를 모두 물리쳤다.
황윤길은 부산으로 돌아오자 급히 장계를 올려 왜국의 정세를 보고하고, “반드
시 병화兵禍가 있을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사신이 서울에 와서 복명復命할 때
임금께서는 그들을 불러 보시고 일본의 사정을 물으셨다. 황윤길은 먼저 보고한
대로 대답하였는데, 김성일은 말하기를,
“신은 그곳에서 그러한 징조[兵禍]가 있는 것을 보지 못하였습니다.”
라고 하며, 인하여 “황윤길이 사람들의 마음을 동요시키는 행동은 옳지 않습니
다.”라고 말하였다.
이에 의논하는 사람들은 혹은 황윤길의 의견을 주장하고 혹은 김성일의 의견을
주장하였다. 이때 나는 김성일에게 묻기를,
“그대의 말은 황사黃使(황윤길)의 말과 같지 않는데, 만일 병화가 있으면 장차
어떻게 하려는가?”
하니 그는 말하기를,
“나도 역시 어찌 왜倭가 끝내 움직이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을 하겠습니까? 다만
황사의 말이 너무 중대하여 지방이 놀라고 당황한 것 같으므로 이를 해명하였을
따름입니다.”
라고 하였다.
38) 釜山浦: 지금의 부산
39) 一岐島․ 博多州․ 長門州․ 浪古耶: 일본에 있는 지명
40) 國都: 일본의 경도(京都)
41) 藩臣: 번병(藩屛)의 신하라는 뜻. 대마도는 세종 때 삼포를 개항한 뒤부터 조선에 세공을 바쳤으
므로 이렇게 말함
42) 天皇: 일본의 임금
43) 關白: 일본의 막부시대의 벼슬 이름, 태정대신의 윗자리에 있어 실제적인 집권자. 등원(藤原) 시대
부터 시작되어 명치유신 때 폐지되었으나, 어원은 한서 곽광전(藿光傳) “凡事皆關白光, 然後奏御
天子(모든 일은 다 먼저 곽광에게 관백한 연후 천자에게 아뢴다.” 하는데서 따온 말임
44) 博陸候: 한나라 때 곽광에게 봉한 작명
45) 藿光: 전한(前漢) 때 사람, 소제(昭帝) 때 대사마대장군이 되어 정사를 돕고, 이어 선제(宣帝)를 섬
겨 20여년 동안 궁중을 마음대로 출입함. 기린각공신(麒麟閣功臣)이 제1인자라고 칭함
46) 便服: 평상시에 입는 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