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성이 함락되었다. 임금께서는 가산嘉山으로 행차하시고, 동궁東宮께서 종묘사직
의 신주를 받들고 박천博川으로부터 산골의 군郡으로 들어가셨다.
이보다 먼저 적병이 대동강의 모래 위에 나누어 주둔하였다. 적은 10여 개의 둔진屯陳
을 만들고 풀을 엮어서 막을 치고 있었는데, 벌써 여러 날이 지났으나 강을 건널 수가
없었고 그 경비도 자못 태만하였다. 김명원金命元은 성 위로부터 이것을 바라보고 가히
밤을 타서 엄습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날랜 군사를 뽑아서 고언백高彦伯등으로 하
여금 이를 거느리게 하여 부벽루浮碧樓밑 능라도나루[綾羅島渡]로부터 몰래 배로 군사를
건너게 하였다. 처음에 삼경三更208)에 거사擧事하기로 약속하였으나 시간을 어겨서 다 건
너가고 보니 벌써 새벽이었다. 적의 여러 막사를 살펴보니 적은 아직도 일어나지 않았
으므로, 드디어 먼저 그 제1진을 돌격하니, 적들이 놀라서 소란하여졌다. 우리 군사는
적을 많이 쏘아 죽였다. 이때 사병士兵임욱경任旭景은 먼저 적진으로 뛰어들어 힘써 싸웠
으나 적도들에게 죽음을 당하였는데, 이 싸움에 적의 말 3백여 필을 빼앗았다. 그런데
갑자기 여러 곳에 주둔하였던 적들이 다 일어나서 크게 달려들므로, 우리 군사는 물러
서서 달아나 도로 배로 달려왔다. 그러나 배 위에 있던 사람은 적들이 이미 뒤에 육박
하므로 중류中流에 있으면서 감히 물가로 가서 배를 대지 못하니, 물에 밀려 들어가서
죽은 사람이 많았고, 나머지 군사들은 또 왕성탄王城灘으로부터 어지럽게 강을 건너왔다.
이를 본 적들은 비로소 강물이 얕은 것을 보고 건너왔다. 이때 우리 군사로서 여울을
지키던 사람들은 감히 화살 한 대도 쏘지 못하고 다 흩어져 달아났다. 왜적들은 대동강
을 건너와서도 오히려 성안에 수비대가 있을 것을 의심하여 머뭇거리면서 전진하지 못
하였다.
이날 밤에 윤두수尹斗壽․ 김명원金命元은 성문을 열어서 성안에 있는 사람들은 다
나가게 하고, 군기軍器와 화포火砲를 풍월루風月樓의 연못 속에 침몰시켰다. 윤두수
등은 보통문普通門으로부터 나와 순안順安에 이르렀는데 적병은 뒤쫓아오는 사람이
없었다. 종사관從事官김신원金信元은 혼자서 대동문大同門을 나와서 배를 타고 물흐
름을 따라 강서江西로 향하였다. 그 다음날에 왜적은 성밖에 이르러 모란봉牧丹峯으
로 올라가서 오랫동안 바라보다가 성이 비어 사람이 없는 것을 알고는 곧 평양성
으로 들어왔다.
먼저 임금께서 평양성에 이르니 조정의 의논은 다 식량을 근심하여 여러 고을
의 전세田稅를 가져다가 평양으로 옮겨두었는데, 성이 함락되자 본래 창고에 있던
곡식 10만 석石과 함께 다 적의 소유가 되고 말았다.
이때 나의 장계가 박천에 이르고, 또 순찰사巡察使이원익李元翼과 그 종사관從事官이
호민李好閔209)이 역시 평양으로부터 와서 적이 강을 건너온 상황을 말하였다. 그래서
밤에 임금과 내전(왕비)께서는 길을 떠나 가산嘉山으로 향하시고, 세자世子에게 명하여
종묘사직[廟社]의 신주를 받들고 다른 길을 경유하여 사방에 있는 군사를 거두어 모
아 나라의 흥복興復을 도모하게 하였다. 이에 신료臣僚들을 나누어 수행하게 하였는데,
영의정 최흥원崔興源이 어명을 받들고 세자世子를 수행하게 되었다. 우의정 유홍兪泓도
또한 세자를 수행하겠다고 스스로 청하였으나 임금께서는 이에 대답하지 않았다. 임
금의 행차가 이미 나가니 유홍이 길가에 엎드려 하직하고 가려하였다. 내관이 여러
번 우의정 유홍이 하직하기를 청한다고 아뢰었으나 임금은 끝내 대답하지 아니하셨
다. 유홍이 드디어 동궁東宮[世子] 뒤를 따라갔다.
이때 윤두수尹斗壽는 평양성에 있었는데 아직 돌아오지 못했으므로 행재소에는
대신大臣이 없었고, 오직 정철鄭澈이 옛 재상으로서 모셨다. 임금께서 가산嘉山에 이
르니 이미 오경[五鼓]210)이 되었다.
208) 三更: 밤 12시경.
209) 李好閔(1533~1634) : 조선조 선조 때의 공신. 자는 고언(考彦), 호는 오봉(五峯), 본관은 연안(延
安). 임진왜란 때 임금을 의주까지 모시고, 요동으로 가서 명나라 군사를 청하여 와 평양싸움을
승리로 이끄는 데 공이 컸다. 부제학 ․ 예조판서 ․ 대제학 ․ 좌찬성 등의 벼슬을 지냄
210) 五鼓: 오경. 곧 새벽 4시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