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동도사遼東都司195)가 진무鎭撫임세록林世祿으로 하여금 우리나라로 와서 왜적의
정세를 탐지하게 하였다. 임금께서는 명나라 사자를 대동관大同館에서 접견하였다.
나는 5월에 관직을 파면 당하였다가 6월 1일에야 다시 복직되고, 이날 바로 당장
唐將을 접대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때 요동遼東에서는 왜적이 우리나라를 침입하였다는 말을 들은 지 얼마 아니
되어 또 서울이 함락되고 임금이 서쪽지방으로 피란하였다고 들리더니 또 왜병이
이미 평양平壤에 이르렀다고 들리므로 몹시 이를 의심하여, 왜적의 변고가 비록 급
하다 하더라도 이토록 빠를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어떤 사람은 “우리나
라가 왜적의 앞잡이가 되었다.”고도 말하였다. 임세록이 오자 나는 그와 더불어
함께 연광정練光亭으로 올라가서 그 형세를 살펴보니, 한 왜적이 대동강의 동쪽 숲
사이로부터 잠깐 나타났다가 숨더니 조금 뒤에는 2~3명의 왜적이 계속 나와서 앉
고 혹은 서며 그 태도가 태연하고 한가로와 마치 나그네가 길을 가다가 쉬고 있
는 모양과 같았다. 나는 임세록에게 그것을 가리켜 보이면서 말하기를,
“이는 왜적의 척후입니다.”
하니, 임세록은 기둥에 의지하여 바라보고 이를 믿지 않는 기색을 지으면서 말
하기를,
“왜적의 군사라면 왜 저렇게 적겠습니까?”
하기에 나는 말하기를,
“왜적은 교묘하고 간사하여 비록 대군이 뒤에 있더라도 먼저 와서 정탐하는 자
는 몇 놈에 지나지 않습니다. 만약 그 적은 것을 보고 이를 소홀히 여기다가는
반드시 왜적의 꾀에 빠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니 임세록은 “그렇겠습니다.”하면서 급히 회답하는 자문咨文을 요구하여 가지
고 달려갔다.
조정에서는 좌상左相윤두수尹斗壽에게 명령하여 도원수都元帥김명원金命元과 순찰
사巡察使이원익李元翼등에게 명하여 평양을 지키게 하였다.
며칠 전에 성안 사람들이 임금께서 평양성을 나와 피란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서 저마다 도망하여 흩어져 마을이 거의 비어 버리게 되었다. 임금께서는 세자世子
에게 명하여 대동관문大同館門으로 나와서 성안의 부로父老를 모아놓고 평양성을 굳
게 지키겠다는 뜻을 타이르게 하였더니, 부로들이 앞으로 나와서 말하기를,
“다만 동궁東宮196)의 명령만 듣고서는 백성들의 마음이 믿어지지 않을 것이오니,
반드시 성상聖上197)께서 친히 타이르는 말씀을 들어야만 되겠습니다.”
하였다. 그 다음날 임금께서는 할 수 없이 대동관문으로 나가시어 승지承旨로 하
여금 전날 동궁이 말한 것처럼 타이르니, 부로들 수십 명은 엎드려 절하고 통곡
하면서 명령을 받들고 물러가 드디어 각기 길을 나누어 나가서, 늙은이, 어린이와
남자, 여자와 자제들로서 산골짝에 숨어 있던 사람을 찾아 불러내어 성안으로 들
어오게 하니, 성안에 백성들이 가득 찼다.
그런데 왜적이 대동강변에 나타나자, 재신宰臣노직盧稷198) 등은 묘사廟社의 위판
位版을 받들고 아울러 궁인宮人을 호위하며 먼저 성을 나왔다. 이에 성안의 아전과
백성들이 난을 일으켜 칼을 빼어들고 그 길을 막고 함부로 쳐서 묘사의 신주를
땅에 떨어뜨리고, 따라가던 재신들을 지목하여 크게 꾸짖으며 말하기를,
“너희들은 평일에 나라의 녹[國祿]만 훔쳐먹다가 이제 와서는 나라 일을 그르치
고 백성들을 속임이 이 같으냐?”
하였다. 나는 연광정練光亭으로부터 임금님이 계시는 행궁行宮으로 달려가면서 길
위에 있는 부녀자와 어린이들을 보았는데, 그들은 다 성난 얼굴로 머리털을 곤두
세워 가지고 서로 함께 소리 질러 외치기를,
“성을 버리고 가시려면 무슨 까닭으로 우리들을 속여서 성안으로 들어오게 하
여 유독 우리들만 적의 손에 넣어 어육魚肉을 만들게 하시려는 겁니까?”
하였다. 궁문宮門에 이르니, 난민亂民들이 거리를 꽉 막았는데 모두들 팔소매를
걷어 올리고 무기와 몽둥이를 가지고 사람을 만나면 막 치며 시끄럽게 어지럽혔
으나, 금할 수가 없었다. 여러 재신들도, 성문 안의 조당朝堂에 있던 사람들도 다
얼굴빛이 하얗게 변하여 뜰 안에 일어서 있었다.
나는 난민들이 궁문 안으로 몰려 들어올까 염려하여 궁문 밖의 섬돌 위에 나와
서 있다가, 그 중에 나이 좀 먹고 수염이 많은 사람을 보고 손짓을 하여 그를 부
르니 그 사람은 곧 앞으로 나왔는데, 그는 곧 그 지방관리였다. 나는 그를 타일러
말하기를,
“너희들이 힘을 다하여 성을 지키고 임금께서 성을 나가기를 원하지 않게 하려
고 하니 나라를 위하는 충성이 지극하구나. 다만 이 일로 인하여 난을 일으키고,
더구나 궁성문까지를 놀라고 요란하게 만들었으니, 심히 놀라운 일이다. 또 조정
에서 마침 굳게 지킬 것을 계청啓請하여, 임금께서 이미 이를 허락하셨는데, 너희
들이 무슨 일로 이렇게 소란을 떠느냐? 너의 모양을 보니 곧 유식한 사람 같다.
모름지기 이 뜻을 여러 사람들에게 잘 타일러서 물러가도록 만들어라. 그러지 않
는다면 너희들은 장차 중한 죄에 빠지게 될 것이니, 그때에는 용서하지 않을 것
이다.”
하니, 그 사람은 곧 몽둥이를 버리고 손을 모아 빌며 말하기를,
“소인은 성을 버리려 한다는 말을 듣고 분한 기운을 이기지 못하여 이와 같은
망령된 짓을 하였사온데, 지금 그 말씀을 듣자오니 소인은 비록 우매하고 용렬하
오나 가슴속에 맺힌 원한이 시원히 열리나이다.”
하면서 드디어 그 무리를 지휘하여 가지고 흩어졌다.
대개 이보다 먼저 조정의 신하들이 적병이 곧 가까워 온다는 말을 듣고 모두
나가 피란하기를 청하였는데, 양사兩司(사헌부司憲府․ 사간원司諫院)와 홍문관弘文館199)
은 날마다 대궐문 앞에 엎드려 힘써 피란하기를 청하고, 인성부원군寅城府院君정철
鄭澈이 더욱 피란하자는 의논을 주장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오늘의 사세는 먼저 서울에 있을 때와는 다른 점이 있습니다. 서울에서는 군대
와 백성들이 함께 무너져 버렸으므로 비록 이를 지키려고 해도 지킬 수가 없었습
니다. 이 평양성은 앞에는 강물이 가로막혔고 그리고 백성들의 마음이 자못 굳건
하며, 또 중원지방中原地方에 가까워 만약 며칠 동안만 굳게 지킨다면 명나라 군사
가 반드시 와서 구원할 것이오니 이를 힘입어서 왜적을 물리칠 수 있겠사오나,
그렇지 못하면 여기로부터 의주義州에 이르기까지는 다시 의지할 만한 성이 없사
오니, 그렇게 된다면 형세는 반드시 나라가 망하는 데 이르게 될 것입니다.”
하였다. 좌상左相윤두수尹斗壽도 나의 의견과 같았다. 나는 또 정철에게 대하여
말하기를,
“평시에 나는 늘 공이 나라를 위하는 일이라면 강개해서 어려운 일이든 쉬운
일이든 회피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였는데, 오늘의 논의가 이와 같은 줄은 헤아리지
못하였습니다.”
하였다. 윤상尹相(윤두수尹斗壽)이 문산文山200)의 시詩인 ‘내가 칼을 빌어 가지고 아
첨하는 신하를 베어 버린다면[我欲借劒斬佞臣]’을 읊으니, 인성寅城(정철鄭澈)은 크게
오하여 옷소매를 뿌리치고 일어나 가버렸다. 평양平壤사람들도 또한 내가 성을 지
키자는 의견을 내세웠다는 말을 들었던 까닭으로, 이날 내 말을 듣고 자못 순종
하면서 물러간 것이다.
저녁에 감사監司송언신宋言愼을 불러서 능히 난민을 진정하지 못한 것을 책망하
였더니, 송언신이 그 앞장을 선 세 사람을 결박하여 대동문大同門안에서 목을 베
어 죽이니, 그 나머지는 다 흩어져 가버렸다.
그때 이미 임금께서는 성을 나가기로 결정하였으나 갈 곳을 알지 못하였고, 조
신朝臣들은 많이들 “북도(함경북도)는 지역이 궁벽하고 길이 험하여 가히 난리를
피할 만하다.”고 말하였다. 대개 이때 적병은 벌써 함경도를 침범하여 도로가 통
하지 못하였고, 또 변고를 보고하는 사람이 없는 까닭으로 조정에서는 알지 못하
였다.
이에 있어서 동지同知이희득李希得을, 그가 일찍이 영흥부사永興府使로서 어진 정
사를 베풀어 민심을 얻었다고 해서 함경도순검사咸鏡道巡檢使로 삼고, 병조좌랑兵曹佐
郞김의원金義元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삼아 북도로 가게 하고, 내전內殿및 궁빈宮嬪이
하의 사람들을 먼저 내보내어 북으로 향하게 하였다. 나는 굳게 이를 간쟁하여
말하기를,
“임금께서 서쪽으로 피란하신 것은 본래 명나라 군사의 구원을 입어 흥복興復을
도모하려 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지금 이미 구원병을 명나라에 청하여 놓고도
도리어 북도로 깊이 들어간다면 중간에서 적병이 길을 가로막아 명나라의 소식도
역시 통할 길이 없을 것인데, 더구나 나라의 회복을 바라오리이까? 또 왜적들이
여러 도道로 흩어져 나갔는데 어찌 북도에는 반드시 적병이 없을 줄 알겠습니까?
만약 그곳으로 들어가셨다가 불행하게도 적병이 뒤따라 이른다면 달리 갈 길도
없고, 다만 북쪽 오랑캐로 가는 길밖에 없사오니, 어느 곳에 의지하겠습니까? 그
위태롭고 급박함이 역시 심하지 않습니까? 지금 조신朝臣의 가속家屬들이 많이들
북도에 피란하고 있는 까닭으로 각각 사사로운 계교를 생각하여 다 북도로 향하
자고 말하는 것입니다. 신에게도 늙은 어머니가 있사옵는데 역시 동쪽 방면으로
피란을 나왔다고 듣고 있습니다. 지금 비록 그 계시는 곳은 알지 못하오나 그러
나 반드시 강원도江原道나 함경도咸鏡道사이로 흘러들어 갔을 것이오니, 신도 역시
사사로운 계교로써 말한다면 어찌 북쪽으로 향할 마음이 없사오리이까? 다만 국
가를 위하는 큰 계교가 남들과 신의 뜻이 동일하지 않은 까닭으로 감히 간곡하게
진술하는 것입니다.”
하고 인하여 흐느껴 울며 눈물을 흘리니, 임금께서 측은하게 여기시며 말씀하시
기를,
“경의 어머니는 어떻게 지내는지, 나의 탓이로구나!”
하셨다. 내가 물러나온 뒤에 지사知事한준韓準이 또 홀로 임금께 뵙기를 청하고
힘써 북도로 향하는 것이 옳겠다고 말하였다. 이에 중전中殿201)께서 드디어 함경도
를 향하여 떠나셨다.
이때 왜적은 대동강大同江에 이른 지가 벌써 3일이나 되었다. 우리들이 연광정練
光亭에 있으면서 건너편을 바라보니, 한 왜적이 나무 끝에 작은 종이를 달아 매어
강가의 모래 위에 꽂고 가므로 화포장火砲匠김생려金生麗로 하여금 작은 배를 타고
가서 이를 가져오게 하였더니, 왜적은 무기도 휴대하지 아니하고 김생려와 손을
잡고 등을 두드리며 극히 친절하게 굴면서 서신[書]을 붙여 보냈다. 그 서신이 이
르러도 윤상尹相은 열어 보려고 하지 않았다. 나는 말하기를,
“열어 본들 무엇이 해로우리오?”
하고 열어보았더니, 그 서면에, “조선국 예조판서 이공각하朝鮮國禮曹判書李公閣下에
게 올립니다.”하였는데, 이는 대개 이덕형李德馨에게 보내는 서신으로 평조신平調信․
현소玄蘇가 마련하여 보낸 것이었고, 그 내용은 대개 이덕형을 보고 강화를 의논하
고자 하는 것이었다.
이덕형李德馨은 조각배를 타고 가서 평조신平調信․ 현소玄蘇를 대동강 가운데서 만났
는데, 서로 위로하고 안부를 묻는 것이 평일과 같았다. 이때 현소玄蘇는 말하기를,
“일본日本이 길을 빌어 중국에 조공朝貢을 하고자 하는데, 조선朝鮮이 이를 허락하
지 않은 까닭으로 일이 이 지경에 이른 것입니다. 지금도 역시 한 가닥의 길을
빌려 주셔서 일본으로 하여금 중국에 통할 수 있게 한다면, 아무 일도 없을 것입
니다.”
하였다. 이덕형은 전일의 약속을 저버린 것을 책망하고, 또 군사를 물러가게 한
뒤에 강화를 의논하자고 말하였다. 그런데 조신調信의 말이 자못 공손하지 않으므
로 각기 회담을 피하고 헤어지고 말았다.
이날 저녁 때 왜적 수천 명이 몰려와서 대동강 동쪽 언덕 위에 진을 쳤다.
195) 遼東都司: 명나라 요동성의 군정을 맡아 다스리는 관직
196) 東宮: 왕세자 궁전의 별칭. 곧 왕세자를 말함.
197) 聖上: 현재 자기 나라 임금의 존칭
198) 盧稷(1545~1618) : 조선조 중기의 문신. 자는 사형(士馨), 본관은 교하(交河). 선조 때 문과에 급
제하여 승정원주서(承政院注書)를 거쳐 청환직(淸宦職)을 지냈다. 임진왜란 때에는 병조참판으로
임금을 호종하였고, 뒤에 벼슬이 병조판서, 판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99) 弘文館: 조선조 때 삼사(三司)의 하나. 궁중의 경서 및 사적을 관리하며 문서를 처리하고, 임금
의 자문에 응하는 일을 맡아 보았다.
200)文山: 중국 송나라 때의 충신인 문천상(文天祥)의 호
201) 中殿: 왕후의 존칭. 중궁전의 약칭. 중궁이라고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