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에 명나라 유격장[遊擊] 심유경沈惟敬이 왔다.
이보다 먼저 조승훈祖承訓이 이미 패전하고 돌아가, 왜적들은 더욱 교만하여져서
글을 우리 군사들에게 보내었는데 ‘염소 떼가 한 호랑이를 친다’는 말이 있었다.
염소는 명나라 군사를 비유함이고, 호랑이는 자기를 자랑함이었다. 왜적들은 가까
운 시일에 서쪽 방면으로 내려간다고 떠들므로 의주義州사람들은 다 피란할 짐을
지고 서 있는 형편이었다.
심유경은 원래 절강성 백성이었는데, 석상서石尙書(석리石理)는 평소 그가 왜국의
실정을 다 안다고 하여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이름을 빌어 내보냈던 것이다. 그는 순
안順安에 이르러 급히 글을 왜적의 장수에게 보내어 성지聖旨239)로써 “조선朝鮮이 무
슨 잘못을 일본에 저지른 일이 있는가? 일본은 어찌하여 마음대로 군사를 일으켰
느냐?”하고 문책하였다.
이때 왜적의 변고가 갑자기 일어나고, 또 그 잔인하고 혹독함을 사람마다 두려
워하여 감히 그들의 병영을 엿보는 사람이 없었는데, 심유경은 노란 보자기에 편
지를 싸서 부하 한 사람을 시켜 등에 지고 말을 달려 가게 하여 보통문普通門으로
부터 성안으로 들어가게 하였다. 왜적의 장수 소서행장은 그 편지를 보고 즉시
“직접 만나서 일을 의논하자.”고 회답하여 왔다. 심유경이 곧 가려고 하자 사람들
은 다 위태로운 일이라 하여 그만두라고 권하는 이가 많았다. 심유경은 웃으면서
말하기를
“저들이 어찌 능히 나를 해칠 수 있으랴.”
하고 3~4명의 부하를 데리고 평양성으로 갔다. 소서행장 ․ 평의지平義智․ 현소玄蘇
등은 군대의 위세를 성대히 베풀고 나와서 평양성 북쪽 십리 밖의 강복산降福山밑
에 모였다.
우리 군사들은 대흥산大興山꼭대기에 올라가서 그 광경을 바라보니, 왜적의 군
사는 매우 많고 창칼이 눈빛처럼 번득였다. 심유경이 말을 내려 왜적의 진중으로
들어가니 왜적들이 떼를 지어 사면에 둘러서므로 붙잡히게 되는가 의심하였다. 날
이 저물어 심유경이 돌아왔는데, 왜적들은 그를 전송하는 예가 매우 공손하였다.
그 다음날 소서행장은 글을 보내 안부를 묻고, 말하기를,
“대인大人(심유경沈惟敬)께서는 시퍼런 칼날 속에서도 낯빛이 하나 변하지 않으시
니 비록 일본 사람이라 하더라도 이보다 더할 수 없겠습니다.”
하였다. 심유경은 이에 대답하기를,
“너희들은 당나라 때 곽영공郭令公240)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하였는가? 그는
혼자서 회흘回紇241)의 만군萬軍속으로 들어가서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는데, 난
들 어찌 너희를 두려워하겠는가?”
하였다. 인하여 왜적과 약속하여 말하기를,
“내 돌아가서 우리 황제[神宗]에게 보고하면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니, 50일을
기한으로 하여 왜군은 평양성 북쪽 십리 밖으로 나와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없도
록 하고, 조선朝鮮군사도 그 십리 안으로 들어가서 그와 싸우지 말도록 할 것이
다.”
라고 했다. 그리고는 곧 그곳 경계에 나무를 세워 금표禁標를 만들어 놓고 갔으
나 우리나라 사람들은 다 그 내용을 알 수가 없었다.
239) 聖旨: 명나라 신종(神宗)의 교지(敎旨)
240) 郭令公: 당나라 명장 곽자의(郭子儀)를 말함. 그는 현종 때 안록산(安祿山)의 난리를 평정하고,
회흘(回紇)의 후범(後犯)을 막는 등 많은 공을 세움
241) 回紇: 중국 동북쪽에 있는 부족, 본래는 흉노족의 후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