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9일에 조총병祖總兵(조승훈祖承訓)의 군사가 평양성을 치다가 이롭지 못하여
물러가고, 사유격史遊擊(사유史儒)이 전사하였다.
이보다 먼저 조승훈祖承訓이 의주義州에 이르자 사유史儒는 그 부대의 선봉先鋒이
되었다. 조승훈은 곧 요좌遼左(요동遼東)의 용맹스러운 장수로 여러 번 북쪽 오랑캐
와 싸워 공을 세웠으므로, 이번 행군에 있어서도 왜적을 반드시 물리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며 가산嘉山에 이르러 우리나라 사람에게 묻기를,
“평양성에 있는 왜적이 벌써 달아나지나 않았는지?”
하므로 “아직 물러가지 않았습니다.”라고 대답하니, 조승훈은 술잔을 들고 하늘
을 우러러 보며 축도하기를,
“적군이 아직 있다고 하니, 반드시 하늘이 나로 하여금 큰 공을 이루도록 하심
이다.”
하였다. 이날 그는 순안順安으로부터 삼경三更에 군사를 출발시켜 나아가 평양성
平壤城을 공격하였다. 마침 큰 비가 와서 성 위에는 지키는 군사도 없었다. 명나라
군사는 칠성문七星門으로부터 성안으로 들어갔는데, 길은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길
이라서 말을 달릴 수가 없었다. 왜적들은 험협한 곳에 의지하여 어지럽게 조총鳥銃
을 쏘았는데, 사유격史遊擊(사유史儒)은 총알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군사와
말들도 많이 죽었다. 조승훈은 드디어 군사를 후퇴시켰는데, 적은 급히 쫓아오지
는 않았으나 뒤에 있는 군사들로 진흙구덩이에 빠져서 스스로 빼낼 수 없었던 사
람은 모두 적에게 죽음을 당한 바 되고 말았다.
조승훈祖承訓은 나은 군사를 이끌고 돌아서서 순안順安․ 숙천肅川을 지나 밤중에
안주성安州城밖에 이르러 말을 세우고 통역관 박의검朴義儉을 불러 말하기를,
“우리 군사는 오늘 왜적을 많이 죽였으나, 불행히 사유격史遊擊이 부상하여 죽고,
날씨도 이롭지 못하여 큰 비가 와 진흙투성이가 되어 능히 왜적을 섬멸시킬 수가
없었으나 마땅히 군사를 더 보태어 다시 쳐들어갈 것이다. 너의 재상에게 말하여
동요하지 말게 하고, 부교浮橋는 또한 철거해서도 안 된다.”
하고 말을 마치고는, 말을 달려 두 강을 건너 군사를 공강정控江亭에 주둔시켰다.
대개 조승훈은 싸움에 패하여 마음에 겁을 내고 적병이 뒤쫓아올까 두려워하여
앞에 두 강으로 가로막으려 한 까닭으로 이와 같이 빨리 서둘렀던 것이다. 나는
신종사辛從事(신경진辛慶晉)로 하여금 가서 위로하게 하고, 또 양식과 음식을 실어
보냈다.
조승훈이 공강정에 머무른 지 2일 동안만 날마다 밤에 큰 비가 와서 여러 군사들
이 들판에서 노숙하고 있었으므로 옷과 갑옷이 다 젖어 조승훈을 원망하였는데, 얼마
안 되어 물러나 요동으로 돌아갔다. 나는 인심이 동요될까 두려워하여 임금에게 계청
하여 그대로 안주安州에 머무르면서 후군後軍이 오는 것을 기다리기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