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28. 명나라 구원병 5천명이 먼저 달려옴

  • 관리자
  • 2021-07-24 오전 11: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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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요동부총병遼東副總兵조승훈祖承訓이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도우러 온다는

기별이 먼저 왔다. 이때 나는 치질병으로 괴로움이 심하여 자리에 누워 일어날

수 없었으므로, 임금께서는 좌상左相(윤두수尹斗壽)으로 하여금 나가서 연도 군사들

의 식량을 보살피라고 하셨다. 나는 종사관從事官신경진辛慶晉으로 하여금 임금에게

아뢰기를,

“행재소에 시임대신時任大臣으로 다만 윤두수 한 사람만이 남아 있을 뿐이므로 그

가 나가서는 안 되겠나이다. 비록 병이 들었다 해도 그래도 자신이 억지로라도

한번 가볼까 여기나이다.”

하니, 임금께서 이를 허락하셨다.

7월 7일에 병을 무릅쓰고 행궁行宮으로 가서 임금에게 절하고 하직하니, 임금께

서 불러 보시므로 엉금엉금 기어 들어가서 아뢰기를, “명나라 군사가 지나가는 길

인 소곶所串남쪽으로부터 정주定州․ 가산嘉山까지는 5천명의 군사가 지나갈 동안에

하루 이틀 먹을 식량은 준비되겠사오나, 안주安州․ 숙천肅川․ 순안順安의 세 고을은

양식을 저장한 것이 없사오니, 명나라 군사가 여기를 지날 때는 마땅히 먼저 3일

동안 먹을 식량은 가지고 안주安州이남에서 먹을 식량으로 준비하여야 하겠습니

다. 만약 구원병이 평양에 이르러서 그날로 수복한다면, 성안에는 좁쌀이 많으므

로 식량을 보급할 수 있겠사오며, 비록 성을 포위하고 여러 날이 된다고 하더라

도 평양平壤의 서쪽 세 고을[江西․ 龍岡․ 咸從] 곡식을 또한 힘을 다하여 옮겨다 군

대가 있는 곳에 공급할 수 있어 군량이 모자라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러한 사정

을 청컨대 이곳에 있는 여러 신하들로 하여금 명나라 장수와 서로 의논하여 융통

성있게 계획하시고 편리한 대로 시행하옵소서.”

하니, 임금께서는 “그렇게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그 앞에 물러나오니, 임금께서

는 안에 분부하여 웅담熊膽과 납약臘藥을 내어주시고, 내의원內醫院219)의 노복 용운龍

雲이라는 사람은 나를 성문 밖 5리까지 전송하면서 통곡하여, 내가 전문령箭門嶺에

오르도록 울음소리가 그대로 들렸다.

저녁 때 소곶역所串驛에 이르니 아전과 군사들이 다 도망하여 흩어져서 그 그림

자도 보이지 않았다. 군관을 시켜 가서 촌락을 수색하게 하였더니 몇 사람을 데

리고 왔다. 나는 힘써 타일러 말하기를,

“나라에서 평소 너희들을 어루만져 기르는 것은 오늘 같은 날에 쓰려는 때문인

데 어떻게 차마 도망하여 피한다는 말이냐? 또 명나라 구원병이 바야흐로 이르러

나라일이 정말로 급하니, 이때야말로 곧 너희들이 수고로움을 다하여 공을 세울

때다.”

하고는, 인하여 공책자空冊子한 권을 꺼내어 먼저 와서 보이는 사람의 성명을

써서 보이며 말하기를,

“뒷날 마땅히 이것으로써 그 공로를 등급매겨 임금에게 알려 상줄 것을 의논하

고, 여기에 기록되어 잇지 않은 사람은 하나하나 조사하여 벌을 줄 것이니, 한 사

람도 그 죄를 면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였다. 그랬더니 조금 뒤에 사람들이 잇달아 와서 다 말하기를,

“소인들이 볼일이 있어서 잠시 나갔었습니다. 어찌 감히 할 일을 피하오리까?

원컨대 저희들 이름을 책에 써넣어 주소서.”

하였다. 나는 사람들의 마음을 수습할 수 있음을 알고 곧 공문을 각처로 보내

이 같은 예로 고공책考功冊220)을 비치하여 놓고 공로의 많고 적은 것을 써 두었다

가 보고하는데 참고하여 시행하도록 하였다. 이에 있어서 명령을 들은 사람들은

다투어 나와서 땔나무와 말 먹일 풀을 운반하여 집을 짓기도 하고 가마솥을 걸어

놓기도 하여, 며칠 동안에 모든 일이 차츰 이루어져 나갔다. 이때에 나는 난리를

만난 백성들로 다급하게 부려서는 안 될 것이라고 생각하여 다만 정성을 다하여

잘 타이르고, 한 사람도 매질하지 않았다. 그 길로 나아가 정주定州에 이르니, 홍종

록洪宗祿이 구성龜城사람들을 다 일으켜 가지고 말 먹일 콩과 좁쌀을 운반하여 정

주定州․ 가산嘉山에 도착시킨 것이 2천여 석石이나 되었다. 나는 오히려 구원병이 안

주安州에 온 뒷일을 근심하였는데, 마침 충청도忠淸道아산牙山창고에 있는 세미稅米

1천2백 석石을 배에 싣고 장차 행재소로 향하려 하다가 정주의 입암立巖에 이르러

정박하고 있었다. 나는 매우 기뻐하며 곧 행재소로 달려가서 임금에게 아뢰기를,

“먼 곳에 있는 곡식이 마치 약속한 듯이 이르렀사오니, 이는 하늘이 중흥中興의

운수를 돕는 것 같습니다. 청컨대 아울러 가져다가 군량을 보충하게 하시옵소서.”

하였다. 이어 수문장守門將강사웅姜士雄을 시켜 입암立巖으로 달려가게 하여 2백석

을 정주定州로, 2백 석을 가산嘉山으로, 8백 석을 안주安州로 나누어 옮기게 하였는

데, 안주는 왜적이 있는 곳과 가까우므로 아직은 배를 물 속에 머물러 기다리게

하였다.

이때 선사포첨사宣沙浦僉使장우성張右成은 대정강大定江의 부교浮橋221)를 만들고, 노

강첨사老江僉使민계중閔繼中은 청천강晴川江부교를 만들어 명나라 군사들이 건널 수

있게 준비하게 하고, 나는 먼저 안주로 가서 군수품을 징발하였다.

이때 왜적은 평양성으로 들어가서 오래도록 나오지 않았는데, 순찰사巡察使이원

익李元翼은 병사 이빈李薲과 함께 순안順安에 주둔하고, 도원수都元帥김명원金命元은

숙천肅川에 있었고, 나는 안주安州에 있었다.

 

 

219) 內醫院: 조선조 때 임금이 복용하는 약을 만드는 일을 맡아보던 관청

220) 考功冊: 공로를 기록하여 논공(論功)의 자료로 만드는 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