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께서 의주義州215)에 이르렀다.
명나라 장수 참장參將대모戴某와 유격장遊擊將사유史儒가 각각 한 부대의 군사를
거느리고 평양으로 향하다가 임반역林畔驛에 이르러 평양성이 벌써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의주義州로 돌아와 주둔하였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군사들에게 주는 은
銀2만냥을 내주어 명나라 관원이 가지고 의주에 도착하였다.
이보다 먼저 요동遼東에서는 우리나라에 왜적의 변고가 있다는 말을 듣고 곧 조
정에 보고하였으나, 조정에서는 의논이 한결같지 않아서 심지어는 우리가 왜적의
향도가 되었다고 의심하기도 하였는데, 유독 병부상서兵部尙書석성石星216)만은 우리
나라의 구원을 열심히 주장하였다. 이때 우리나라에서 사신으로 가 있던 신점申點
이 옥하관玉河館에 묵고 있다가 석성石星의 부름을 듣고서 그 뜰에 이르렀더니, 요
동遼東에서 보내온 왜적 변고의 보고 문서를 내어 보이므로, 신점은 즉시 통곡을
하면서 그 일행과 함께 아침저녁으로 국상을 당해 통곡하는 것처럼 울며 먼저 구
원병을 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병부상서 석성은 이를 임금(신종)에게 알려 두 부
대를 내어보내며 가서 임금을 호위하게 하고, 그 경비로 은銀을 하사할 것을 청하
였던 것이다.
신점申點이 통주通州로 돌아왔을 때에 우리 고급사告急使정곤수鄭崑壽217)가 뒤이어 이
르렀다 병부상서 석성은 그를 화방火房218)으로 인도하여 들여 친히 상황을 물으면서
혹은 눈물을 흘렸다고도 한다. 이때 연달아 파견한 사신이 요동에 이르러 위급함을
알리며 구원병을 보내달라고 청하고, 또 내부內附할 것을 빌었다. 이는 대개 왜적이 벌
써 평양성을 함락시켰다면 그 형세가 물동이를 지붕에서 쏟는 것처럼 세차서 아침이
나 저녁으로 꼭 압록강까지 다다를 것이라고 생각되어, 일의 위급함이 이와 같은 까
닭으로 내부內附하려는 데까지 이른 것이다. 그런데ㅔ 다행스럽게도 왜적은 이미 평양
성에 들어와서는 그 자취를 감추고는, 몇 날이 되도록 늘어붙어서 비록 순안順安․ 영유
永柔가 평양에서 떨어지기가 지척 사이인데도 오히려 침범하지 않았다. 이로 해서 인심
이 차츰차츰 안정되고 남은 군사를 거두어 모으는 한편으로 명나라 구원병을 맞아들
여 마침내는 나라를 회복하는 공을 이루게 되었다. 이는 실로 하늘의 도움이지 사람
의 힘으로는 미칠 바 아니었다.
215) 義州: 평안북도 서북단에 있는 지명. 임진왜란 때 선조가 여기에 피란하여 버틴 곳이다.
216) 石星: 명나라 신종 때 사람. 임진왜란 때에는 병부상서로서 우리나라에 구원병을 보내는 데 적극
적으로 힘썼다. 그러나 심유경(沈惟敬)을 시켜 일본과 강화하려다가 실패하고 정유재란이 일어나
자 파면되고 마침내 옥사함.
217) 鄭崑壽(1538~1602) : 조선조 선조 때의 명신. 자는 여인(汝仁), 호는 백곡(栢谷) ․ 경음(慶陰) ․ 조은
(朝隱), 시호는 충익(忠翼), 본관은 청주(淸州). 선조 때 과거에 급제하여 상주목사 ․ 강원도관찰사 ․
우승지 ․ 병조참판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는 명나라에 구원병을 청하는 데 성공하고 돌아와서
판돈령부사가 되고, 이어 예조판서를 거쳐 좌찬성이 되었다.
218) 火房: 안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