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금께서 정주定州로 행차하셨다. 임금께서 평양성을 나온 뒤로부터 인심이 허물
어져서 지나는 곳마다 난민亂民들이 문득 창고로 들어가서 곡물穀物을 약탈하여 순
안順安․ 숙천肅川․ 안주安州․ 영변寧邊․ 박천博川의 창고가 차례로 다 허물어져 버렸다.
이날에 임금께서는 가산嘉山을 출발하셨는데, 이때 가산군수 심신겸沈信謙은 나에
게 일러 말하기를,
“이 고을에는 양곡이 자못 넉넉하고, 관청에도 또한 백미白米1천석石이 있습니
다. 이것을 명나라 군사에게 먹이려 했는데 불행히도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
다. 공公이 만약 조금만 머물러 진정 시킨다면 고을 사람들이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난동이 일어날 것이오니, 소인도 또한 여기에 머무를 수
가 없겠으므로 장차 해변海邊을 향하여 몸을 피하겠습니다.”
하였다. 이때 심신경은 이미 그 부하들에게 명령할 수가 없었다. 홀로 내가 데
리고 있는 군관 6명과 도중에서 거둬 모은 패잔병 19명은 나와 약속하고 스스로
따라오게 하였으므로 각각 활과 화살을 휴대하고 나의 곁에 있었다. 심신겸이 이
를 의지하여 스스로 지키려 하는 까닭으로 그렇게 말하는 것이었다. 나는 차마
갑자기 떠날 수가 없어서 얼마동안 대문大門에 앉아 있으니 해는 벌써 한낮이 지
났다. 다시 생각해보니 임금의 명령도 없는데 마음대로 머물러 떠나가지 않은 것
이 도리에 미안하므로, 드디어 심신겸과 헤어져 길을 떠나 효성령曉星嶺에 올라서
머리를 돌려 가산嘉山을 바라보니 고을 안은 이미 어지러워졌다. 심신겸은 창고의
곡식을 다 잃어버리고 도망하였다.
그 다음날에 임금께서는 정주定州를 떠나서 선천宣川으로 향하시며 나에게 정주
에 머물러 있으라고 명령하셨다. 이때 고을 사람들은 이미 사방으로 흩어져 피란
하고, 다만 늙은 아전 백학송白鶴松등 몇 사람이 성안에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나는 길가에 엎드려서 임금께서 성을 떠나시는 것을 전송하고 눈물을 닦고서 연
훈루延薰樓아래 앉아 있는데, 군관軍官몇 사람이 좌우의 섬돌 밑에 있고 거두어
모은 패잔병 19명도 오히려 가지 않고서 말을 길가의 버드나무에 매어놓고 서로
둘러앉아 있었다. 저녁때가 될 무렵에 남문南門을 바라보니 몽둥이를 든 사람들이
밖으로부터 연달아 와서 왼쪽 방면을 향하여 가므로 군관軍官을 시켜 이를 살펴보
게 하였더니, 창고 밑에 모여든 사람이 벌써 몇 백명이나 된다고 하였다. 나는 내
가 거느린 군사는 적고 약한데 만약에 난민이 더 많아져 그들과 싸운다면 제어하
기가 어려울 것이니, 먼저 그 약한 자를 쳐서 그들로 하여금 놀라 흩어지도록 하
는 것이 옳겠다고 생각하였다. 이때 성문을 보았더니 또 이어오는 사람이 10여
명이나 있었다. 나는 급히 군관을 불러 19명의 군사를 데리고 달려가서 그들을
잡아오게 하였는데, 그 사람들이 바라보고 도망하는 것을 뒤쫓아 가서 9명을 잡
아왔다. 나는 곧 그들의 머리를 풀어 산발하고 손을 뒤로 돌려 묶고 벌거벗기게
한 다음에 창고 옆 길가로 조리 돌려 보이며, 10여 명의 군사가 그 뒤를 따라가
면서 큰 소리로 외쳐 말하기를,
“창고를 약탈하려는 도둑을 사로잡아서 곧 사형에 처하여 효시梟示211)하련다.”
하니, 성안의 사람들이 이를 보게 되고, 이때 이미 창고 아래 모여든 사람들도 이
를 바라보고 모두 놀라서 다 서문西門으로부터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이로부터 정주
창고에 있는 곡식은 겨우 보전되었고, 그리고 용천龍川․ 선천宣川․ 철산鐵山등 여러 고
을도 창고를 덮치려는 사람이 또한 없어졌다.
정주판관定州判官김영일金榮一은 무인武人이었다. 그는 평양平壤으로부터 도망하여
돌아와서 그 처자를 바닷가에 두고 창고의 곡식을 훔쳐내어 이를 보내려 하였다.
나는 이 말을 듣고 그를 잡아 들여 죄를 하나하나 들춰내어 말하기를,
“너는 무장武將의 몸으로 싸움에 패하고도 죽지 않았으니 그 죄만 하여도 죽일
만한데, 또 감히 관곡官穀을 훔쳐내려느냐? 이 곡식은 장차 명나라 구원병을 먹이
려는 것이지. 네가 사사로이 가져다 먹을 것이 아니다.”
하고 곤장 60대를 때렸다.
조금 뒤에 윤좌상尹左相(윤두수尹斗壽) ․ 김원수金元帥(김명원金命元)와 무장武將이빈李
薲212) 등이 평양으로부터 다 정주定州에 이르렀다. 임금께서 정주를 떠나실 때 명
령하시기를,
“좌상이 만약 올 것 같으면 또한 정주에 머물러 있도록 하라.”
고 하셨다. 윤두수가 이르렀기에 나는 그에게 임금의 명령을 전하였으나, 윤두
수는 대답도 하지 않고 바로 행재소로 향하여 갔다. 나도 역시 김명원과 이빈 등
을 머물러 정주를 지키게 하고 임금님의 수레를 뒤쫓아 용천龍川에 이르렀다.
이때 여러 고을의 백성들은 평양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왜적들이 뒤따라
올 것이라고 생각하고서 모두들 산골짝으로 숨어 버려 길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강변의 여러 고을 중에서 강계江界등지 같은 곳도 다 그러하다고 들렸다.
나는 길을 떠나 곽산산성郭山山城밑에 이르렀는데, 보니 두 갈래 길이 있으므로
하졸下卒에게 묻기를,
“이 길은 어디로 가는 길이냐?”
하니, 그는 대답하기를,
“구성龜城으로 달리는 길입니다.”
하였다. 나는 말을 세우고, 종사관從事官홍종록洪宗祿을 불러 말하기를,
“연도沿道의 창고가 하나같이 비어 있으니, 명나라 구원병이 비록 온다고 하더라
도 무엇으로써 식량을 공급하겠는가? 이 부근에서는 오직 구성 한 고을만 창고에
저장한 곡식이 자못 넉넉한 모양이나, 그러나 또한 아전과 백성들이 다 흩어졌다
고 들리니 그것을 옮겨 낼 계책이 없구나. 그대는 오랫동안 구성에 있었으니, 그
곳 사람들이 만약 그대가 왔다는 말을 들으면 비록 산골짝 안에 숨어있더라도 반
드시 나와서 보고 왜적의 형세를 들으려 할 것이니, 그대는 여기서 급히 구성으
로 달려가서 그들을 타일러 말하기를, ‘왜적들이 평양성으로 들어왔으나 아직 나
오지 않았고, 명나라 구원병이 방금 크게 오고 있어서 이의 수복이 멀지 않았다.
하나 근심스러운 것은 군량이 부족한 것뿐인데, 너희들은 품관品官이든 아전이든
논할 것 없이 모두 온 고을의 힘을 다하여 군량을 옮겨다가 군용에 모자라지 않
게 한다면 뒷날에 반드시 중한 상이 있을 것이다.’하라. 이와 같이 한다면 아마도
마음과 힘을 합해서 군량을 정주定州․ 가산嘉山까지 운반하여 가히 뜻하는 바를 성
공시킬 수 있을 것이다.”
하였더니, 홍종록은 감개하여 승낙하고는 길을 나누어 떠나 가고, 내 자신은 용
천으로 향하였다. 대개 홍종록은 기축년의 옥사[己丑獄]213)에 관련되어 구성에 귀
양을 가서 있었는데, 임금께서 평양에 오신 뒤에 비로소 거두어 용서하여 사옹정
司甕正으로 삼았다. 그는 사람됨이 충직하고 성실하여 자신을 잊고 나라의 일을 위
하여는 순국殉國할 마음으로 이험夷險214)을 피하지 않는 뜻을 가지고 있었다.
211) 梟示: 죄인의 목을 베어 높은 곳에 달아매고 여러 사람에게 보여 경계하는 것
212) 李薲(1537~1603) : 조선조 선조 때 무신. 자는 문원(聞遠), 본관은 전주(全州). 임진왜란 때 경상
병사 ․ 평안병사 ․ 순찰사 등을 지냄
213) 己丑獄: 조선조 선조 때(1589)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을 계기로 일어난 옥사(獄事)
214) 夷險: 지리적으로 평탄하고 험악한 곳. 또는 순경(順境)과 역경(逆境)을 말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