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72. 심유경沈惟敬에 관한 이런 일 저런 일

  • 관리자
  • 2021-10-16 오전 9: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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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심유경沈惟敬은 평양平壤으로부터 왜적의 진중으로 출입하느라고 노고가 없지는않았다. 그러나 강화講和를 명목으로 한 까닭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좋아하지 않았다. 최후에 왜적이 부산釜山에 머물러 있으면서 오랫동안 바다를 건너가지 않고, 이책사李册使(이종함李宗諴)가 도망하여 돌아왔으므로, 명나라 조정에서는 심유경을 부사副使로 삼아 양사楊使(양유형楊冇亨)와 함께 왜국으로 들여보냈으나, 마침내 좋은 보람을 얻지 못하고 돌아왔으며, 이에 소서행장과 가등청정 등이 다시 들어와서해상에 주둔하였다.

 이에 중국(명나라)과 우리나라에서는 의논이 자자하게 일어나서 잘못을 모두 심유경에게 돌렸고, 또한 심한 사람은 말하기를, “심유경이 왜적과 공모하여 배반하려는 형편이었다.”고까지 하였다.

  우리나라의 중[僧] 송운松雲108)이 서생포西生浦에 들어가서 가등청정을 만나보고돌아와 말하기를, “왜적이 명나라를 침범하려 하고, 그 말하는 것이 아주 사리에 어긋나니, 즉시 사유를 갖추어 명나라 조정에 아뢰어야 하겠습니다.”라고 하니, 듣는 사람은 더욱 노여워하였다.

 심유경은 화가 미칠 것을 알고 근심하고 두려워하여 어찌할 바를 알지 못했다. 그래서 곧 김명원金命元에게 글을 보내 그 일의 시종始終을 서술하여 스스로 변명하였는데, 그 글의 내용은 이러하였다.

  세월이 빨리 흘러 지나간 일들이 어제 일 같습니다. 아아! 지난 날에 왜적이 귀국의 지경을 침구하여 바로 평양平壤까지 이르렀으니, 그 안중에는 벌써팔도八道에 무서운 것이 없었습니다. 나는 황제의 명령을 받들고 왜적의 실정을 정탐하고 서로 기회를 보아 제어하며, 족하足下(김명원金命元)와 이체찰사李體察使(이원익李元翼)를 어지러운 나라 속에서 서로 만났는데, 평양성 서쪽 지방일대의 백성들이 유리流離하여 괴롭게 지내며 마치 바늘 방석에 앉아 있는 것처럼아침에 저녁 일을 도모하지 못할 형편에 처하여 있는 것을 목격하고 특히 마음 아프게 여겼습니다. 족하[金命元]도 몸소 그러한 일들을 겪었으니나의 여러 말을 기다릴 것이 없겠습니다. 나는 소서행장을 격문으로 불러서 건복산乾伏山에서 만나 서쪽을 침범하지 말 것을 약속하였는데, 왜적은 명령

을 듣고 감히 어기지 못한 지 몇 달을 지난 뒤에 대병大兵이 이르게 되고, 평양의 승전을 가져오게 되었습니다. 설혹 그때 내가 오지 않았더라면 왜적은 조공祖公(조승훈祖承訓)이 패전한 기회를 타가지고 義州까지 달려갔을지도 가히 알 수 없었으니, 평양 한 도道의 백성들이 그 심한 해독을 입지 않은 것은 귀국貴國의 다행함이 막대한 것입니다. 얼마 뒤에 왜적의 장수 소서행장이 서울로 물러가서 지키고, 총병總兵 수가秀家가 거느린 장수 삼성三成(석전삼성石

田三成) ․ 장성長盛(흑전장정黑田長政) 등 30여 명의 장수들이 군사를 모으고 진영을 연결하여 험준한 곳을 지키므로 굳건하여 쳐부술 수가 없었습니다. 벽제관碧蹄館 싸움 뒤에는 더욱 나아가서 승리하기가 어려웠는데, 그때 판서判書 이덕형李德馨이라는 사람이 나를 개성開城에서 찾아보았는데, 그는 “장차 왜적의 세력이 강성하게 떨치는데, 대병大兵이 또 물러간다면 서울은 반드시 수복

할 가망이 없습니다.”하고 울면서

 나에게 이르기를,

 “서울은 나라의 근본이 되는 곳이므로 이를 수복하여야 여러 도를 호령하여 소집할 수 있는데, 지금 사세가 이 지격에 이르렀으니 장차 어떻게 하겠습니까?”

 하였다. 나는 말하기를,

 “다만 서울을 수복하고 만약 한강漢江 이남을 수복하지 못한다면, 여러 도의 형세도 또한 뜻대로 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하니, 이덕형은 말하기를.

 “진실로 서울을 수복하는 것만도 실은 소망에 지나치는 일입니다. 한강 이남은 우리나라의 군신들이 스스로 조금씩 수복하여 지탱하기 어렵지 않을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나는 말하기를,

“내가 그대 나라와 도모하여 힘써 서울을 수복하고, 아울러 한강 이남의 여러 도를 회복하고서, 이어 왕자와 배신을 돌아오게 하여 바야흐로 나라를

온전하게 만들어 보리다.”

 하니,

이덕형은 눈물을 흘리고 머리를 조아리어 감격하여 말하기를,

 “과연 그와 같이 될 수 있다면 노야老爺는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어 주는것으로, 그 공덕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나는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갔는데,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등이 가등청정의 병영으로부터 사람을 파견하여 달려와서

 나에게 말 하기를,

 “진실로 서울을 수복하는 것만도 실은 소망에 지나치는 일입니다. 한강 이남은 우리나라의 군신들이 스스로 조금씩 수복하여 지탱하기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하였습니다. 나는 말하기를,

 “내가 그대 나라와 도모하여 힘써 서울을 수복하고, 아울러 한강 이남의 여러 도를 회복하고서, 이어 왕자와 배신을 돌아오게 하여 바야흐로 나라를

온전하게 만들어 보리다.”

 하니, 이덕형은 눈물을 흘리고 머리를 조아리어 감격하여 말하기를,

 “과연 그와 같이 될 수 있다면 노야老爺는 우리나라를 다시 만들어 주는것으로, 그 공덕은 적지 않을 것입니다.”하였습니다. 조금 뒤에 나는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갔는데, 왕자王子 임해군臨海君 등이 가등청정의 병영으로부터 사람을 파견하여 달려와서

나에게 말하기를,

 “혹시 나라로 돌아갈 수 있게 된다면 한강 이남의 땅은 어떤 곳이든 거리끼지 않고 마음 내키는 대로 이를 주겠습니다.”

하였으나, 나는 그 뜻을 따르지 않았습니다.

 또 왜적의 장수와 맹세하기를,

 “돌려보내겠거든 돌려보내고, 돌려보내고 싶지 않으면 너희들 뜻대로 죽이든지 마음대로 하라. 그 밖의 일은 꼭 말할 필요도 없는 것이다.”

하였습니다.

 왕자王子는 귀국의 왕세자王世子인데, 난들 감히 소중한 줄 알지 못하겠습니까? 이런 때를 당하여서는 차라리 죽이려면 죽이라고 말했지 다른 말은 허락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부산釜山에 와서는 재물을 허비하고 예를 극진히 하였는데, 전에 거만하다가 뒤에 공경해진 것은 때에 완급함이 있고, 일에 경중이 있어 부득이 한 짓이라고 여겨집니다.

 몇 마디 말 끝에 서울에서 왜적이 물러갔는데 연도의 영책營柵과 남기고 간 군량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으며, 한강이남 여러 도道는 다 수복하였고,

왕자王子와 배신陪臣도 나라로 돌아왔습니다. 마침내 한 통의 서신으로써 적군을 견제시켜 왜적의 우두머리들은 손발이 부산釜山의 막다른 바닷가에 묶인

채 명령을 기다린 지 3년 동안 감히 망령되이 움직이지 못하고, 계속하여 봉공封貢하는 일의 의논이 이룩하게 되었습니다. 나는 명령을 받들어 회의를 조절하고, 서울에서 다시 족하[金命元]와 이덕형 등을 만나보고

 말하기를,

“지금 가서 봉공을 하겠는데, 왜적이 혹시 물러가면 귀국이 뒷일을 잘 처리하는 계교는 어떠합니까?”

하였더니, 이덕형은 그 말에 응하여 말하기를,

“뒷일을 잘 처리하는 일은 우리나라 군신들이 맡을 책임이니, 노야老爺는 꼭 괘념하지 마소서.” 하였습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아닌게 아니라 그에게 큰 역량이 있고 큰 식견이 있어 위대한 인물임을 기특하게 여겼는데, 지금에 이르러 그때 사실을 조사하여 본즉 그 문장文章과 공업功業이 서로 부합되지 않는 것 같으므로 나는 판서 이덕형을 위하여 애석하게 여기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부산釜山․ 죽도竹島의 여러 병영이 곧 철거되지 않은 것은 나의 책임이나, 기장機張․ 서생포西生浦 등 여러 곳에서는 왜적들이 다 건너가고, 병영 울타리[營栅]도 다 불타버리고, 지방관地方官에게 나누어 주어서 함께 잘 어울렸다고 합니다.

 어째서 가등청정이 한 번 건너와서 한 번 싸웠다는 말도 들리지 않고, 한 개의 화살을 꺾지도 않았는데도 지방관이 몸에 배어 양보한 것은 무슨 까닭

입니까?

 이미 한강 이남은 스스로의 힘으로 조금씩 수복하여 지탱해 갈 수 있다고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이미 수복하여 놓은 것도 이와 같이 잃어버리는 데

이르게 하는 것입니까? 또 뒤를 잘 처리한다는 일은 우리나라의 책임이라고 말하였는데, 어찌하여 큰 계교를 들려주지 아니하고 다만 궐하闕下에서 울부

짖는 한 가지 계책뿐입니다?

 병법에 이르기를,

 “힘의 강하고 약한 것은 당하지 못하고, 수의 많고 적은 것은 대적하지 못하고, 수의 많고 적은 것은 대적하지 못한다.”라고 하였습니다. 나도 역시 어려운 일을 귀국에 여러 당사자들에게 책임 지우려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말하자면 ‘완만할 때때는 그 근본을 다스리고, 급할 때는 그 말단을 다스린다.’ 고

하였으니, 군사를 훈련하여 잘 지키고, 때를 보아서 적을 제어해야 하는데도 귀국의 당사자 여러분들도 역시 이를 그대로 놓아두고 묻지 않아서는 안 될 것입니다.

 바다를 건너온 이래로 나는 네 번이나 귀국의 임금을 만나서 피차간에 묻고 대답하는 말이 가슴속에서 기탄없이 나왔고, 또 때에 적합하여 조금도거짓이나 꾸밈이 없었고 조금도 헛된 것이나 잘못됨이 없었습니다. 임금의 마음은 피차간에 환하게 트이고 분명하였습니다. 나는 진실로 ‘동국(조선)의일이 이와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가히 다른 염려는 없을 것이다.’고 생각 하였는데, 뜻밖에도 귀국의 모신謀臣과 책사策士는 온갖 기지를 써서 이간하는 사건을 번갈아 만들어 안으로는 위험한 말로써 명나라 조정을 격노하게 만들었고, 밖으로는 약한 군사로써 일본에 싸움하도록 만들었습니다. 송운宋雲의 한 마디 설화에 이르러서도 또 예법禮法 밖에서 나왔습니다.

그는 “앞에서 군사를 몰고 가서 명나라를 치려한다.”라고 말하고, “팔도八道를 갈라 주고, 임금이 친히 바다를 건너 귀복하려한다.”라고도 말하는 등 잠깐 동안에 두세가지 그런 말을 하였는데, 이는 다만 이 말이 임금으로 하여금 생각을 내어 움직이게 하고, 명나라 조정을 격동시켜 구원병을 내도록 한 것임을 알겠습니다. 귀국은 다만 팔도八道109)가 있을 뿐인데, 만약 이를 다 허락하고, 또 임금이 친히 바다를 건너가 귀복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귀국의 종묘사직과 백성들도 다 일본의 것이 되는데, 또 어찌 두 왕자王子를 돌려올지 이를 생각하지 않으오리까? 나는 삼척동자三尺童子라고 결코 실언失言이 이에 이르지는 않으리라고 생각됩니다. 가등청정은 비록 횡포하더라도 또한 이처럼 제멋대로 행동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또 우리 당당한 명나라 조정이 외번外蕃을통솔 ․ 제어하는데 스스로 큰 체통이 있으므로, 한번 은혜를 베풀고 한 번 위엄을 부리는 것도 역시 자연 때가 있는 것이니, 반드시 수백 년 동안 서로 전하여 오던 속국을 도외시하여 관계를 그냥 내버려둠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며, 또한 약속을 받들지 않는 역적(일본)을 놓아서 우리의 번국藩國(조선朝鮮)을 노략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을 것이 당연한 도리라 하겠습니다.

 나는 극히 일을 살피지는 못하였으나, 내외內外 친소親疎의 분별과 역순逆順 향배向背의 인정에 이르러서는 역시 사람마다 쉽게 깨닫는 것인데, 하물며 황

제의 칙명을 받들고 이 일을 조정함에 있어서 그 성패成敗와 휴척休戚에 관계가 가볍지 않은지라. 감히 귀국의 일을 업신여기거나 뜻담아 두지 않으리이까? 또 감히 일본의 횡포를 숨겨두고 알려주지 않으리이까? 족하足下(김명원金命元)는 큰 체통을 이해하는데 깊으시고, 나라의 정사를 다스리는 데 자세하시므로 이 글을 보내는 것이오니, 행여 족하가 내 평소의 충심을 잘 살펴서 곧 이러한 사정을 임금에게 아뢰고, 아울러 당사관료들로 하여금 그 까닭을 대략이라도 알도록 하며 다행이겠습니다. 이미 이르기를, “우리 명나라 조정을 우러러 아주 온전한 계획을 도모하며, 마땅히 처분함을 들어서 다함이 없는 행복을 바란다.”고 하였으니, 다만 잘못된 계교로써 늘 수고하고 졸렬함이 없도록 할 것입니다. 간절히 부탁하면서 뜻을 다하지 못합니다.

 하였다. 이 글을 본다면 서울을 수복한 이전의 사실은 말이 조리에 맞아서 가히 징계할 만하지만, 부산釜山이후의 사실들은 섞갈린 말과 숨기는 말임을 면치못할 것이다. 그러나 공과 죄는 저절로 서로 가려 숨길 수 없는 것이다. 뒷날에 심유경을 논하는 사람은 마땅히 이 글로써 단안을 삼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사실을 기록하여 두는 것이다.

 심유경沈惟敬은 유세遊說하는 선비였다. 평양성平壤城싸움 뒤에 두 번이나 적진속으로 들어갔는데, 이는 사람들이 어렵게 여기는 것인데, 그는 마침내 능히 말로써 군사를 대신하여 많은 왜적을 쫓아내고, 이 수천리의 땅을 수복하였던 것이다. 그는 맨 끝에 한 가지 일이 어긋나서 큰 화(사형)를 면하지 못하였으니 슬픈 일이다.

 대개 평행장平行長(소서행장少西行長)은 심유경을 가장 신임하였다. 그가 서울에 있을 때에 심유경은 비밀히 소서행장에게 말하기를, 너희들이 오래도록 여기(서울)에 머물러 물러가지 않아서 명나라 조정에서는 다시 대군을 일으켜 이미 서해를 통해서 들어왔으니 충청도로 나와서 너희들이 돌아갈 길목을 끊어 놓을 것이다. 이때는 비록 가려고 해도 뜻대로 될 수 없을것이다. 나는 평양성에서부터 너와 정이 들어 친숙한 까닭으로 말하여 주지 않을

수 없을 따름이다.” 했다. 이에 소서행장은 두려워하여 드디어 서울을 떠나가 버렸다.

 이 일은 심유경沈惟敬이 스스로 우정승[右相] 김명원金命元에게 말한 것이고, 또한 김명원金命元(김상金相)이 나에게 그 사실을 이와 같이 말한 것이다.

 

 108) 松雲(1544~1610) : 조선조 선조 때의 고승(高僧). 속성은 임씨, 자는 이환(離幻), 호는 송운(松雲) ․사명당(泗溟堂), 시호는 자통홍제존자(滋通弘濟尊者), 법명은 유정(惟政), 본관은 풍천(豊川).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서산대사의 휘하에서 활약하였고, 뒤에 승군을 거느리고 체찰사 류성룡을 따라 명나라 구원병과 더불어 왜적을 쳐 평양성을 수복하고, 도원수 권율과 함께 의령에내려가 전공을 세워 당상(堂上)에 올랐다. 정유재란 때에도 의승(義僧)을 거느리고 전공을 세웠으며, 또 일본으로 건너가던 덕천가강(德川家康)을 만나 강화를 맺고 포로 3천 5백명을 돌려오는 등 애국적인 활약이 컸다. 저서에 분충서난록(奮忠紓難錄)과 사명집(四溟集)이 있다.

109) 八道: 조선조 때의 지방행정구역. 국초(태종 때)에 전국을 경기도 ․ 충천도 ․ 전라도 ․ 경상도 ․ 강원도 ․ 황해도 ․ 평안도 ․ 함경도로 나눴는데, 그 말엽(고종 때, 1896)에 13도로 개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