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城은 포악한 도둑을 막고 백성을 보호하는 곳이므로 마땅히 견고함을 으뜸으
로 한다. 옛날 사람들은 성城의 제도를 말할 때 다들 성윗담[雉]을 말하였는데, 이
른바 천치千雉니 백치白雉니 하는 것이 곧 이것이다.
나는 평상시에 책을 읽는 것이 거칠었으므로 성윗담[雉]이 어떠한 물건인지를
알지 못하고, 늘 살받이터[垛]가 이에 해당하는 줄로 알아서 일찍이 의심하기를,
“살받이터가 다만 천 개나 백 개면 그 성城이 지극히 작아서 능히 여러 사람을 수
용할 수가 없겠으니 장차 어떻게 할까?”하였더니, 왜란의 별고가 일어난 뒤에 비
로소 척계광戚繼光의 기효신서紀效新書를 얻어서 읽어보고는, 곧 성윗담[雉]이란 살
받이터[垛]가 아니고, 곧 지금의 이른바 곡성曲城과 옹성甕城이라는 것임을 알았다.
대개 성城에 곡성과 옹성이 없다면, 비록 사람이 하나의 살받이터 사이에 방패
를 세우고 외면에서 날아오는 화살과 돌을 가려 막는다 하더라도 적들이 와서 성
밑에 바짝 달라붙는 놈은 보고도 막을 수가 없는 것이다.
기효신서紀效新書에는 50개의 살받이터마다 하나의 성윗담을 만들어 놓되 밖으
로 두세 길[丈] 나오게 하고, 두 성윗담 사이는 서로 50개의 살받이터를 떨어지게
만들고, 하나의 성윗담이 25개의 살받이터를 점령하게 하면 화살의 위력이 바야
흐로 강성하고 좌우를 마음대로 돌아보면서 활을 쏘기에 편리하므로, 적군이 와서
성 밑에 붙어 의지할 수 가 없는 것이다.
임진년(1592) 가을에 나는 오랫동안 안주安州에 머물러 있었는데, 생각하기를,
왜적이 지금 평양성에 있으니, 만약 하루아침에 이쪽으로 내려온다면 행재소行在所
의 전면에서는 한 곳도 가로막힐 곳이 없는데도 그 힘을 헤아려 보지도 않고 안
주성을 수축하고 이를 지키려고 하였다.
그런데 9월 9일[重陽日]에 우연히 청천강晴天江가로 나가서 주성州城을 돌아보며,
가만히 앉아서 깊이 생각한 지 오랜 동안에 문득 한 가지 계책을 생각해 내었는
데, 이것은 성 밖에 마땅히 형세를 따라서 따로 뾰족한 성[凸城]을 성 윗담 제도
[雉制]처럼 쌓고 그 속을 텅 비워 사람을 수용할 수 있도록 만들고, 그 전면과 좌
우에 대포구멍을 뚫어내어 그 속으로부터 대포를 쏠 수 있게 만들고, 그 위에 대
적할 다락을 세우되 다락과 다락은 서로 천 보步이상 떨어지게 만들고, 대포 속
에는 새알 같은 쇠탄환을 몇 말[斗] 넣어 두었다가 왜적들이 성 밖에 많이 모여들
때에 대포 탄환을 두 곳에서 번갈아 쏘면 사람과 말들은 말할 것도 없고 비록 쇠
와 돌이라도 다 부서져 가루가 되지 않는 것이 없을 것이니, 이와 같이 된다면
다른 성가퀴[堞]에는 비록 지키는 군사가 없더라고 다만 수십 명으로 하여금 포루
砲樓를 지키게 하여도 적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할 것이다.
이는 실로 성城을 지키는 묘법妙法으로서 그 제도는 비록 성 윗담을 본떴다 하더
라도 그 공효는 성 윗담 보다도 나을 것이 틀림없는 것이다. 대개 천보의 거리
안에 적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게 된다면 이른바 운제雲梯․ 충차衝車와 같은 따위
는 다 소용이 없게 될 것이다.
이 일은 내가 우연히 생각해 낼 수 있었는데, 그때 이를 즉시 행재소에 아뢰고,
뒤에 경연 자리에서도 여러 번 이 말을 내었었다. 또 사람을 시켜 그것이 반드시
쓸 만한 것임을 보이려 하여 병신년(선조宣祖29년, 1596) 봄에 서울 동쪽 수구문
水口門밖에 한 곳을 가려 돌을 모아 이것을 만들다가 완성하지도 못하였는데, 이론
異論이 어지러이 일어나서 그만두고 만들지 않았다.
뒷날에 만약 원대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있으면 나 같은 사람의 말이라고 해서
버리지 말고 이런 제도를 들어 마련한다면, 그것이 적을 막는 방법으로서 이로운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