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65. 왜적의 간사하고 교묘한 꾀

  • 관리자
  • 2021-10-03 오전 9:29: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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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은 가장 간사하고 교묘하여 그 군사를 쓰는 법이 거의 한 가지 일도 남을

속이는 꾀에서 나오지 않은 것이 없었다. 그런데 임진년(1592)의 일로써 본다면

가히 서울에서는 교묘한 꾀를 썼으나, 평양平壤에서는 졸렬하였다고 말할 것이다.

우리나라는 태평세월이 백 년 동안이나 계속되어 백성들은 전쟁을 알지 못하다

가, 갑자기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말을 듣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엎어지고 넘어지

며, 먼 곳 가까운 곳 할 것 없이 바람에 쓰러지듯 다 넋[瑰魄]을 잃고 말았다.

왜적은 파죽지세破竹之勢95)로 열흘 동안에 바로 서울까지 들이닥쳐서 지혜로운

사람으로 하여금 전략을 도모하지 못하게 하였고, 용감한 사람으로 하여금 과감한

결단을 내리지 못하게 하였으므로 인심은 무너져서 수습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이것은 병가兵家96)의 좋은 꾀며 왜적의 교묘한 계책이었다. 그러므로 서울을 빼앗

는 데는 교묘하였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때 왜적은 스스로 항상 이긴다는 기세를 믿고서 그 뒷일은 돌아보지 않고 여

러 도道로 흩어져 나아가 그들 마음대로 미쳐서 날뛰었다. 군사가 나누어지면 세

력이 약하지 않을 수 없는 법인데, 천리에 진영을 연이어 쳐놓고 오랫동안 날짜

를 끌고 버티었으니, 이른바 굳센 화살도 멀리 나가고 보면 끝에 가서는 노魯나라

에서 나는 엷은 깁[魯縞]97)도 뚫을 수 없다는 것이며, 장숙야張叔夜98)의 이른 바

“여진女眞99)은 군사를 쓸 줄 모르는데, 어찌 외로운 군사로 깊이 들어왔다가 능히

돌아갈 수 있겠는가?”하는 것과 거의 근사한 것이라고 하겠다. 이로써 명나라 군

사는 4만명으로 평양성平壤城을 쳐부쉈고, 평양성이 부서지자 그 여러 도에 퍼져

있던 왜적들은 역시 다 기운이 빠져서, 비록 서울은 아직도 그들이 점거하고 있

었으나 대세는 벌써 위축되었다. 이럴 때 우리 백성들로서 사방에 퍼져 있던 사

람들이 곳곳에서 공격하니 왜적들은 수미首尾가 서로 구원할 수 없게 되어 마침내

는 도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평양성에서는 전략이 졸렬하

였다는 것이다.

아아! 왜적이 잘못한 계교는 우리로서는 다행한 일이었다. 진실로 우리나라로

하여금 한 사람의 장수라도 있어서 수만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시기를 보아 특별

한 계교를 썼더라면 그 뱀처럼 늘어선 것을 쳐서 끊어 놓아 그 요긴한 등성이를

나눠 놓았을 것이다. 이와 같이 된 뒤에야 왜적들의 마음은 놀라고 간담이 부서

져서 수십년 수백년 동안이라도 감히 우리를 바로 보지도 못하고 다시는 뒷 염려

가 없었을 것이다.

그 당시에 우리는 너무 쇠약하여 힘이 능히 이를 처리할 수 없었으며, 명나라

여러 장수들도 또한 이런 계책을 내 쓸 줄 알지 못하여 왜적으로 하여금 조용히

가고 오게 해서 거의 경계하거나 두려움이 없이 온갖 일을 온갖 수단 방법으로

요구하게 하였다. 이때에 왜적에게 대처하는 전략은 하책下策에서 나와서 봉작과

조공[封貢]으로써 그들을 견제하려고 하였으니, 가히 탄식할 일이며 가히 애석한

일이라 하겠다. 지금에 이르러 이를 생각하여 보아도 사람으로 하여금 팔을 거머

쥐고 분개하게 한다.

 

 

95) 破竹之勢: 세력이 강하여 모든 적을 억누르고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가는 것을 가리키는 말

96) 兵家: 군사학을 연구하는 사람, 또는 그런 학파를 말함

97) 魯縞: 노(魯)나라에서 생산되던 흰 비단 이름

98) 張叔夜: 송(宋)나라 휘종(徽宗) 때 사람. 자는 계중(契中), 시호는 충문(忠文). 금나라와 싸워 휘종

이 적에게 잡혀 갈 때 따라가다가 먹지 않고 자결하였다.

99) 女眞: 만주 동부에 살던 퉁구스 계통의 한 족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