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50. 임금이 서울로 돌아오고 사신들이 일본에 왕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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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04 오전 9:1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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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1593)에 임금께서 서울로 돌아오셨다.

12월에 명나라 사신 행인사行人司39)의 행인사헌行人司憲이 우리나라에 왔다.

이보다 먼저 심유경沈惟敬은 왜적의 장수 소서비少西飛를 데리고 관백關白(풍신수길

豐臣秀吉) 항복문서[降表]를 가지고 돌아왔으나, 명나라 조정에서는 그 항복문서가

관백[關酋]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고 소서행장[行長] 등이 거짓으로 만든 것이라고

의심하였다. 또 심유경이 겨우 돌아오자마자 진주성이 함락당하게 되니 강화하겠

다는 뜻이 진실이 아니라고 여겨 소서비를 요동遼東에 머물러 두고 오래도록 회답

하지 않았다.

이때 제독提督(이여송李如松)과 여러 장수들은 다 돌아가고 오직 유정劉綎․ 오유충

吳惟忠․ 왕필적王必迪등에게 속한 만여 명의 군사가 팔거八莒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

리고 중앙 지방 할 것 없이 굶주림이 심하고, 또 군량을 운반하는데 피곤하여 늙

은이 어린이들은 도랑과 골짜기에 쓰러졌고 장정들은 도둑이 되었으며, 거기에다

가 전염병으로 해서 거의 다 죽어 없어지고, 심지어는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

내가 서로 잡아먹는 지경에까지 이르고, 죽은 사람의 뼈가 잡초처럼 드러나 있었

다.

얼마 안되어 유정의 군사가 팔거八莒로부터 남원南原으로 옮기고, 또 남원으로부

터 서울로 돌아와서 10여 일 동안 머물러 머뭇거리다가 서쪽으로 돌아갔다. 그런

데 왜적들은 오히려 바닷가에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더욱 두려워하였다.

이때의 명나라 경략經略송응창宋應昌이 탄핵을 당하여 돌아가고, 새 경략經略으로

고양겸顧養謙이 대신 요동遼東으로 왔는데, 그는 참장參將호택胡澤을 파견하여 차자

[箚]를 가지고 와서 우리 군신群臣들을 타일렀다. 그 대략은,

“왜놈들이 까닭 없이 그대 나라를 침범하였는데, 그들은 대를 쪼개는 것 같은

형세로 서울과 개성 ․ 평양 등 세 도회지를 점거하고, 그대 나라의 땅과 백성을 10

분의 8~9는 빼앗아 가졌고, 그대 나라 왕자王子와 배신陪臣을 사로잡았다. 황제께서

는 크게 노하시어 군사를 일으켜 한 번 싸워서 평양平壤을 쳐부수고, 두 번 진격

하여 개성을 되찾았다. 그러나 왜놈들은 마침내 서울에서 도망하여 가고 왕자와

배신을 돌려보내고, 2천여 리의 땅을 수복하였다. 여기에 소비한 내탕금[帑金]40)도

많았으며, 군사와 마필[士馬]의 죽은 수도 역시 적지 않았다. 우리 조정에서 조선

[屬國]을 대접하는 은의恩義가 이에 이르렀으니, 황제의 망극한 은덕은 역시 퍽 지

나쳤었다. 지금은 군량도 이미 다시 운반할 수 없으며 군사도 이미 다시 쓸 수

없게 되었는데, 왜놈들도 역시 우리 위엄을 두려워하여 항복을 청하고 또 봉공41)

封貢하기를 빌었다. 명나라 조정에서도 바로 이때야말로 그 봉공封貢을 허락하며 그

외신外臣되는 것을 용납하고, 왜적을 한 놈도 남기지 않고 다 몰아내어 바다를 건

너가게 하여 다시는 그대 나라를 침범하지 않게하며 전쟁을 종식시키려 함은 곧

그대 나라를 구원하려는 계획을 마련하기 위한 까닭이다. 지금 그대 나라는 양식

이 다 떨어져서 백성들이 서로 잡아먹는 형편인데, 또 무엇을 믿고 군사를 청하

려는가? 명나라에서 이미 군량을 그대 나라에 주지 않고, 또 봉공封貢의 청을 왜놈

들에게 끊어 버리면 왜놈들은 반드시 노여움을 그대 나라에 내어서 그대 나라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니, 어찌 가히 일찍 스스로 좋은 계교를 마련하지 않겠는가?

옛날 월나라 구천句踐42)이 회계會稽에서 곤욕을 당하였을 때 어찌 오나라 부차夫

差43)의 살점을 씹어 먹고 싶어 하지 않았겠는가? 그러나 얼마 동안 그 부끄러움을

꾹 참고 견딘 것은 뒷날을 기다림이 있었던 때문이었다. 그 자신은 또한 부차의

신하가 되고, 그 아내는 또한 그(부차)의 첩이 되었었다. 하물며 지금 왜놈은 신

하나 첩이 될 것을 중국에 청하고 있으니, 스스로 너그럽게 그 뜻을 받아들이고

천천히 도모하는 것은 곧 구천句踐의 군신君臣관계의 도모함보다도 나은 것이다.

이것을 능히 참지 못한다면 이는 발끈 성내는 졸장부의 소견에 불과할 따름이니,

원수를 갚고 부끄러움을 씻는 영웅다운 품이 아닌 것이다. 그대 나라가 왜倭를 도

모하기 위하여 봉공封貢을 청하게 하여 만약 청하는 뜻대로 이루게 해준다면 왜倭

는 반드시 더욱 중국에 감복할 것이고, 또 조선에도 고맙게 여겨 반드시 전쟁을

그만두고 가버릴 것이다. 왜놈들이 가버린 뒤에 그대 나라의 군신君臣이 드디어 애

를 쓰고 속을 태우면서 와신상담臥薪嘗膽44)하며 구천句踐이 한 일을 닦아 나간다고

하면 하늘의 운수가 좋게 돌아와서 어찌 왜놈에게 원수를 갚을 날이 없을 줄 알

랴?”

라고 하였다. 그의 길게 늘어놓은 천백 마디의 뜻은 이와 같았다.

호택胡澤이 객관에 묵고 있는지 3개월이 넘도록 조정의 의논은 결정을 짓지 못

하였고, 임금의 생각도 더욱 난처한 일로 여기셨다. 나는 이때 병으로 휴가 중에

있었는데, 장계를 올려 아뢰기를,

“왜적에게 봉공을 청하게 한다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사오니 실로 불가합니다.

오직 근일의 사정을 상세히 갖추어 중국에 알려 그 처분을 듣는 것이 마땅하겠습

니다.”

하고 여러 번 아뢰자 그제야 임금께서는 이를 허락하셨다. 이에 진주사陳奏使45)

허욱許頊이 명나라로 갔다.

이때 고경략顧經略(고양겸顧養謙)은 남의 말 시비로 해서 가고, 새 경략經略으로 손

광孫鑛이 와서 그를 대신하였다.

그런데 병부兵部에서 황제에게 주청奏請하여 왜사 소서비少西飛를 데리고 명나라

서울로 들어오게 하여 세 가지 일을 따졌다. 그 내용을 말하면,

“첫째로, 다만 봉작[封]만 요구하고 조공[貢]은 요구하지 말 것. 둘째로, 한 사람

의 왜병도 부산釜山에 머물러 있지 말 것. 셋째로, 영원히 조선朝鮮을 침범하지 말

것. 만약 약속대로 할 것 같으면 즉시 봉작을 봉할 것이나, 약속대로 하지 않을

것 같으면 안 될 것이다.”

하니, 왜사 소서비少西飛는 하늘을 가리켜 맹세하며 그 약속을 지키겠다고 청하

였다.

그러자 드디어 심유경沈惟敬으로 하여금 다시 왜사 소서비少西飛를 데리고 왜영倭

營으로 들어가 선유宣諭하게 하고, 또 이종성李宗誠․ 양방형楊方亨을 상사부사[上副使]

로 삼아 왜국으로 가서 평수길平秀吉(풍신수길豐臣秀吉)을 일본국왕日本國王으로 봉하

게 하고, 그리고 이종성 등으로 하여금 우리 서울에 머물러 왜적들이 다 철수하

는 것을 살펴보고 나서 왜국으로 떠나게 하였다.

을미년乙未年(선조宣祖28년, 1595) 4월에 이종성 등이 한성漢城46)에 와서 연달아

사자를 보내어 왜적에게 바다를 건너 돌아갈 것을 재촉하느라고 사자들의 왕래가

끊어지지 않았다. 이에 있어서 왜적들은 먼저 웅천熊川47)의 몇 진陳과 거제巨濟․ 장

문場門․ 소진포蘇津浦등 여러 둔屯을 철수하여 그 믿음성을 보이고는 또 말하기를,

“전자 평양平壤에서와 같이 속임수를 당할까 염려되오니 원컨대 명나라 사신으로

하여금 속히 왜영倭營으로 들면 마땅히 모든 것을 약속한 대로 하겠습니다.”

라고 하였다.

8월에 양방형楊方亨이 병부의 차자(공문)에 따라서 먼저 부산釜山에 이르렀는데,

그러나 왜적은 날짜를 늦추면서 즉시 다 철수하지 않고, 다시 상사上使가 오는 것

을 청하므로 사람들은 이를 많이 의심하였다. 병부상서兵部尙書석성石星은 심유경의

말을 믿고 왜적이 다른 뜻이 없다고 생각하였으며, 또 군사를 물러가게 하는 데

급하여 누차 이종성을 재촉하여 먼저 가게 하였다. 이때 명나라 조정에서의 의논

은 이론이 많았으나 석성은 분연히 자기 자신이 책임을 지고 이 일을 맡고 나섰

다.

9월에 이종성이 양방형의 뒤를 이어 부산에 이르렀는데, 왜장 평행장平行長은 즉

시 와서 만나보지도 않았다. 그러면서 또 말하기를,

“장차 가서 관백關白에게 복명하여 결정을 얻은 연후에 명나라 사신을 맞이하겠

다.”

고 하였다. 소서행장은 일본日本으로 들어갔다가 병신년丙申年(선조宣祖29년,

1596) 정월에야 비로소 돌아왔으나, 오히려 군사를 철수하는 일에 대하여는 분명

하게 말하지 않았다. 이때 심유경沈惟敬은 두 사신(양방형 ․ 이종성)을 부산에 머물

러 두고 또 혼자서 소서행장과 함께 먼저 바다를 건너가면서 장차 명나라 사신을

맞이할 예절을 의논하여 결정지으러 간다고 말하므로 사람들은 그 내막을 헤아릴

수가 없었다. 심유경은 비단옷을 입고 배에 올랐는데, 그 깃발에는 ‘두 나라를 조

정하여 싸움을 그만두게 한다[調戢兩國].’는 네 글자를 크게 써서 배위에 달라고

뱃머리에 서서 떠나갔다. 그가 가고 난 뒤 오랫동안 회보가 없었다.

이종성李宗誠은 곧 개국공신開國功臣이문충李文忠의 후손인데, 그 공으로 벼슬을 이

어받은 부진하고 귀한 집안의 자제였으나, 자못 겁이 많았다. 이때 어떤 사람이

이종성에게 말하기를,

“왜추倭酋(관백關白풍신수길豐臣秀吉)가 사실은 봉작[封]을 받을 의사가 없고 장차

이종성 등을 꾀어 데려다 가두어 놓고 곤욕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다.”

라고 하니, 이종성은 몹시 두려워하여 밤중에 미복(평복)으로 병영을 빠져나와

서 하인들 수행원들과 행장 소용품과 인장 부절[印節] 등을 다 내버려두고 도망하

였다. 이튿날 아침에 왜군은 비로소 이 사실을 알고 길을 나누어 그를 뒤쫓아 가

서 양산梁山의 석교石橋까지 가보았으나, 찾아내지 못하고 돌아왔다. 양방형楊方亨은

홀로 왜군의 병영에 머물러 있으면서 여러 왜군들을 잘 어루만지면서 또 우리나

라에도 공문을 보내어 놀라 소동하지 말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때 이종성은 감히

큰 길을 경유하여 가지 못하고 산골로 들어가서 숨어다니느라고 며칠 동안 밥을

먹지도 못하다가 경주慶州로부터 서쪽으로 떠나갔다.

얼마 있다가 심유경沈惟敬과 소서행장이 비로소 부산으로 돌아왔다. 왜군은 또

서생포西生捕․ 죽도竹島등지에 주둔하였던 군사를 철수시켰는데, 아직 철수하지 않

은 것은 다만 부산釜山의 네 둔진[四屯]뿐이었다. 이어 심유경은 양부사楊副使(양방

방楊方方)를 데리고 바다를 건너 일본으로 갔는데, 이때 심유경은 또 우리나라 사

신도 동행할 것을 요구하며 그 조카 심무시沈懋時를 보내어 빨리 떠나게 하라고 재

촉하였다. 조정에서는 좋아하지 않았으나, 심무시가 반드시 함께 가고자하므로 마

지못하여 무신武臣이봉춘李逢春등을 수행하는 배신陪臣이라고 칭하여 그 요구에 응

하기로 하였다. 이때 어떤 사람이

“무인武人이 저쪽(일본)에 가면 실수하는 일이 많을 것이니, 마땅히 문관文官으로

사리를 잘 아는 사람을 가게 하는 것이 옳겠다.”

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때 황신黃愼48)이 심유경의 접반사接伴使로 왜군의 병영에

가 있었으므로, 황신으로 하여금 따라가게 하였다.

명나라 사신 양방형楊方亨과 심유경沈惟敬이 일본으로부터 돌아왔다.

이보다 먼저 양방형 등이 일본에 이르니, 관백關白(풍신수길豐臣秀吉)은 관사[館宇]

를 성대하게 꾸며놓고 사신을 영접하려고 하였는데, 마침 하룻밤새 큰 지진이 일

어나서 거의 다 허물어져 버렸으므로 드디어 다른 집에서 맞아들였다. 그(풍신수

길)는 두 사신(양방형 ․ 심유경)과 함께 한두 차례 만났는데, 처음에는 명나라 봉작

[封]을 받을 것처럼 하다가 갑자기 크게 성을 내며 말하기를,

“우리가 조선朝鮮의 왕자(임해군 ․ 순화군)을 놓아 돌려보냈으니, 조선에서는 마땅

히 왕자로 하여금 와서 사례하게 해야 할 것인데도, 사신도 벼슬이 낮은 사람을

보냈으니 이는 곧 우리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하였다. 그래서 황신黃愼등은 임금

의 분부도 전하지 못하였다. 그는 아울러 양방형 ․ 심유경 등에게도 돌아가라고 재

촉하므로 그대로 돌아왔는데, 역시 명나라에도 사은謝恩하는 예禮가 없었다.

이때 왜적의 장수 평행장平行長(소서행장小西行長)은 부산포釜山浦로 돌아왔고, 가등

청정은 다시 군사를 거느리고 계속 서생포西生捕에 주둔하며 ‘꼭 왕자王子가 와서

사례를 해야만 비로소 전쟁을 그만둘 것이다.’고 소문을 퍼뜨렸다. 대개 관추關酋

(관백關白풍신수길豐臣秀吉)의 요구하는 것이 아주 커서 다만 봉공封貢뿐만 아니었는

데, 명나라 조정에서는 봉작[封]만 허락하고 조공[貢]은 허락하지 않았으며, 심유경

은 소서행장과 서로 친숙하여 임시 미봉책으로 구차스레 일을 성사시켜 보려고

하여 그 실정을 명나라 조정과 우리나라에 알리지 않았으므로 일이 마침 내 순조

롭게 합의되지 못하고 말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즉시 명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그 사실을 빨리 보고하였다. 이

에 있어서 석성石星․ 심유경沈惟敬은 다 죄를 짓게 되고, 명나라 군사도 다시 나오게

되었다.

 

 

39) 行人司: 조근(朝覲) ․ 빙문(聘問)의 사무를 관장하는 관청. 행인(行人)은 여기 소속된 관직

40) 帑金: 내탕금(內帑金). 임금의 사사로운 재산

41) 封貢: 봉작(封爵)과 조공(朝貢)

42) 句踐: 중국 춘추시대 월왕(越王)의 이름. 그는 회계산(會稽山) 싸움에서 오왕(吳王) 부차(夫差)에게

패하여 곤욕을 당하다가 화약을 맺고, 20년 뒤에 부차를 쳐 멸망시켜 그 치욕을 씻었다.

43) 夫差: 중국 춘추시대 오왕의 이름. 부왕(父王) 합려(闔閭)가 월왕 구천에게 패하여 죽자 회계산에

서 그를 쳐부숴 원수를 갚았으나, 뒷날 구천에게 패하여 죽고 나라도 망하였다.

44) 臥薪嘗膽: 월왕 구천의 고사(故事). 섶에 누워 잠자고 쓸개를 맛본다는 말로, 곧 원수를 갚기 위하

여 온갖 괴로움을 참고 견딘다는 뜻

45)陳奏使: 우리나라 서울의 옛 이름, 한양성이라는 뜻 

46) 漢城: 임금에게 사정을 자세히 설명하여 아뢰는 사명을 가지고 가는 사신

47) 熊川: 경상남도 창원군에 있는 지명

48) 黃愼(1560~1619) :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자는 사숙(思叔), 호는 추포(秋浦), 시호는 문민(文敏),

본관은 창원(昌原). 선조 때 알성과(謁聖科)에 급제, 임진왜란 때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오고, 전라

감사로 활약했다. 벼슬이 대사헌, 호조판서에 이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