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 書示柳訓導 宗直 서시류훈도 종직
류종직柳宗直 훈도訓導에게 써서 보여주다
勝日逢東魯(승일봉동노) 벗들이 모이는 날 동쪽 강학소講學所에서 만나려고,
吟筇出北林(음공출북림) 시인의 대지팡이 짚고 북림北林으로 나갔네.
同穿荒逕澁(동천황경삽) (벗과) 함께 지나가도 험한 오솔길 힘들었는데,
仍過暮江深(잉과모강심) 저물녘에 강물이 깊었지만 다시 또 건너갔네.
腰老嫌圍帶(요로혐위대) 허리가 쇠약하여 허리띠 조이기 달갑잖고,
頭童懶着簪(두동라착잠) 대머리라 머리꽂개를 채우기가 싫으네.
閒身幸無事(한신행무사) 관직 없는 몸인데다 다행히 별난 일도 없어,
雲水好追尋(운수호추심) 자연풍광 찾아다니는 걸 좋아한다네.
☆류종직(柳宗直:1548∼1619):류종직은 본관이 풍산(豊山)으로, 부친이 유빈(柳贇:자字 미숙美叔 호號 고산권옹孤山倦翁으로 권옹파倦翁派의 개문開門 시조임)이며, 유빈의 제2자(子)로, 종직의 자는 경백(敬伯), 호군(護軍)이며, 서애선생과는 삼종三從 곧 8촌간이다. 묘지는 봉화(奉化) 태자산(太子山)에 있다. 참고로 종직의 아우인 의병장 종개(宗介:1558∼1592)의 경력을 약기(略記)하면 다음과 같다. 종직(宗直)의 아우이며, 자는 계유季裕이다. 1579년(선조 12)에 진사가 되고, 훈도로서 1585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경적經籍 인쇄와 향축香祝을 담당하던 관청인 교서관(校書館)의 정자(正字:정9품)가 된 뒤 전적(典籍:성균관의 정6품 벼슬)을 역임하고 향리로 돌아와 있던 중 임진왜란을 당하였다. 이 때 사족(士族)들이 적에게 대항하려 하지 않고 피난하자, 홀로 향병 수 백 명을 모아 고을을 보전하다 함경도 지역에서 태백산맥을 타고 퇴각하던 왜적을 맞아 싸우다가 소천(小川)에서 전사하였다. 이 소식이 전해지자 향리의 사족들이 서로 들고 일어나 왜적과 싸워 영남일대의 왜적을 격퇴하였다. 참의(參議)에 추증되고, 봉화(奉化)의 경현사우(景賢祠宇)에 제향(祭享)되었다. 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규장각한국학연구원[奎 106])에 보임. 문수홍 기록 참조.) 풍산류씨세보(豐山柳氏世譜)에는 류종직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