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過彈琴臺有感。次朴昌世先生韻。幷序
과탄금대유감。차박창세선생운。병서
余在朝建議。以爲都城以長江爲固。而忠州居上流。忠州不守。則都城不可保。往時申砬不知進據鳥嶺之險。以固忠州。而引賊入平地。與戰於城下。一敗塗地。浹旬之間。三都皆失守。今當於鳥,竹二嶺。設險以備不虞。又築城彈琴臺。使可據守。船運黃海道漁鹽。遡流而上。散糴山郡。旣爲民利。漸可儲置軍糧云云。事幾就緖。而余以譴去國。其事俱罷。今過其下。獨前時貯魚鹽小草屋數間在耳。古人云。天下不如意事。十常八九。豈謂是耶。昔朴先生祥。牧此州有詩曰。異境森羅不可探。彈琴臺下水如藍。文章强首無遺墓。翰墨金生有廢庵。落日上江船兩兩。斜風盤渚鷺三三。陶詞莫遣佳人唱。太守聞來面發慚。次其韻。以寓余意云。
나는 조정에서 도성都城[서울]은 남한강을 이용해서 견고하게 방비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충북 북부 가운데 위치한) 충주忠州는 (남한강의) 상류에 위치하니, 충주를 수비하지 못하면, 도성은 보전할 수 없다고 건의하였다. 이전에, 신립申砬이 (경북 문경聞慶과 충북 괴산槐山사이) 조령鳥嶺의 험준한 지역으로 전진해서 (방어진지를) 점거한 다음 충주를 견고하게 방어할 줄 모르고, (후퇴하여) 적을 평지로 끌어들여, 적과 (충주의 탄금대彈琴臺) 성 아래에서 격전을 치른 나머지, 처절하게 패배하여 수습할 수 없게 되었다. (불과) 열흘 사이에, (상주尙州, 문경聞慶, 충주忠州 등) 세 곳의 큰 고을을 모두 지켜내지 못했다.
지금은 조령과 (경북 풍기읍豊基邑과 충북 단양군丹陽郡 사이의) 죽령竹嶺 두 고개에 파수를 보고, 방어진지를 구축하여 대비하고 있으므로 걱정할 것 없다. 또한 탄금대彈琴臺에도 축성하여, 황해도의 생선과 소금을 배로 운반하여, 물길을 따라 상류로 가서, 산촌에 위치한 고을에 미곡을 공급하도록 굳게 지키고 있으니, 이것은 백성의 편익을 위한 것이었으며, 군량미 같은 것도 점차 비축할 수 있게 되었다.
일처리를 타당하게 안배했지만, 내가 견책을 받고 조정에서 물러나면서, 그 일은 모두 중지되었고, 지금 내가 그 아래를 지나가는데, 내가 지난 날 생선과 소금을 비축했던 초가 몇 채가 남아 있을 따름이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천하에 뜻과 같지 않는 일이, 보통 열에 여덟아홉은 된다”고 하였는데, 어찌 (나의) 이 일을 두고만 이른 것이겠는가!
옛날에 박상朴祥 선생이 이곳 충주에 목사牧使로 있을 때 시를 읊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
“빼어난 수림 경관 다 볼 수 없지만,
탄금대 아래 강물 쪽빛같이 푸르네.
문장가 강수强首는 무덤조차 남아 있잖고,
명필 김생金生은 황폐한 암자에 모셔졌네.
석양 무렵 강가에 배 두세 척 떠 있고,
바람 부는 물가에는 백로 서너 마리만 노니네.
라고 읊었다. 그 시의 운韻에 따라서 내 뜻을 기탁하여 여기 한 수 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