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한(三恨)을 지녔던 서애
66세에 생을 마친 서애, 당시로는 천수를 누린 셈이다. 대제학에 이조판서, 형조판서를 거쳐 삼정승의 반열에까지 오르고, 임진왜란의 전 기간 동안 국정의 중심에서 국난타계에 앞장섰다. 그러나 반대파의 격렬한 당파싸움으로 혹독한 비판을 받고 삭탈관작마저 당해 향리로 되돌아온다.
선생의 직첩은 얼마 후 되돌려지지만, 다시는 조정에 나아가지 않고 임진란의 기억을 정리하며 조용히 만년을 보낸다. 그가 『징비록』을 완성한 것은 1604년의 일이다. 그리고 3년 후, 한 시대를 중심에서 이끌었던 거인(巨人)이 숨을 거두었다.
선생은 노년에 ‘자신에게는 세 가지의 한(三恨)이 있노라’고 술회했다.
“임금과 어버이의 은혜에 보답하지 못한 것이 그 첫째이고,
둘째, 벼슬이 지나치게 많고 높았는데 속히 관직에서 물러나지 못했으며,
셋째는 망령스럽게 ‘도를 배우겠다(道學)’는 뜻을 두었으나 이룩한 것이 없다.”
이 얼마나 겸허하고 공손한 삶의 자세였는가 !
영의정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 왔으나 가세가 빈한하여 도토리와 나물죽으로 연명하였다. 1605년(선조38)에 대홍수로 집을 잃고 강 건너 옥연정사에서 잠시 거처하다 9월에 풍산읍 학가산 기슭 서미리로 이사하였다.
이듬해 3월 초가 삼간(弄丸齋)을 마련하였고 은거한 지 두 해가 지난 1607년(선조40) 음력 5월 6일, 66세를 일기로 농환재에서 서세(逝世)하였다.
그 때 맏아들은 이미 세상을 버린 뒤였고 열한살 난 어린 손자가 남았는데 그가 졸재(拙齋) 원지(元之)다.
10년간 정승의 자리에 있었으면서도 생전의 청백리(淸白吏) 녹선(祿選)이 말해주듯 사후에도 조촐하게 장례를 치렀으니, 이는 유명(遺命) 때문이었다. 묘소는 풍산읍 수동에 예장되었다.
묘소에는 ‘領議政文忠公西厓柳先生之墓(영의정문충공서애류선생지묘)’ 라는 묘전비만 있고 신도비는 유명(遺命)으로 인해 새우지 않았다. 정경부인(貞敬夫人) 전주 이씨가 부장되었다.
비는 손자 졸재(拙齋) 원지(柳元之)의 묘갈명(墓碣銘)과 1764년(영조40) 외6대손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의 글씨로, 6대손 도사 임여재(臨汝齋) 류규가 세웠다.
재실(齋室)인 수동재사(壽洞齋舍)는 규모가 상당한데 묘소가 있는 곳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서 자리하고 있다. 원래 재사 가까이 묘소가 있었으나 손자, 졸재(拙齋)가 장성하여 이곳에 터를 잡아 면리(免離)하였다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