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39. 의병義兵이 일어나서 왜적을 무찌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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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8-11 오전 9:28: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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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각 도에서는 의병義兵252)이 일어나서 왜적을 토벌하는 사람이 매우 많았다.

전라도全羅道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사람은 전前판결사判決事김천일金千鎰253) 첨지

僉知고경명高敬命254)과 전前영해부사寧海府使최경회崔慶會였다.

김천일의 자字는 사중士重이다. 그는 의병을 거느리고 먼저 경기도에 이르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가상하게 여겨 그에게 군호軍號를 주어 창의군倡義軍이라고 부르게

하였는데, 얼마 뒤에 군세를 잘 정비할 수 없었으므로 강화도로 들어갔다.

고경명高敬命의 자字는 이순而順이다. 그는 맹영孟英의 아들로 글재주가 있었다. 그

도 또한 향병鄕兵을 거느리고 격문을 여러 군현郡縣으로 보내 왜적을 토벌하였는데,

그는 왜적과 싸우다가 패하여 전사하였다. 그 아들 종후從厚는 그 아버지를 대신하

여 그 무리를 거느리고 이름하기를 ‘복수군復讎軍’이라고 하였다.

최경회崔慶會는 뒤에 경상우병사慶尙右兵使가 되어 진주晉州에서 왜적과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경상도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사람은 현풍玄風사람 곽재우郭再祐255)와 고령高靈사

람 전前좌랑佐郞김면金沔256)과 합천陜川사람 전장령前掌令정인홍鄭仁弘257)과 예안禮

安사람 전前한림翰林김해金垓와 교서정자校書正字류종개柳宗介와 초계草溪사람 이대

조李大朝와 군위교생君威校生장사진張士珍등이었다.

곽재우는 곽월[越]의 아들로 자못 재략才略이 있었다. 그는 여러 번 왜적과 싸웠

는데, 왜적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 그는 정진鼎津을 굳게 지켜 왜적으로 하여금

의령宜寧의 지경에 들어올 수 없게 만들었는데, 사람들은 이는 다 곽재우의 공이라

고 생각했다.

김면은 전에 무장이었던 김세문金世文의 아들로 왜적을 맞아 거창居昌의 우척현牛

脊峴에서 막고, 여러 번 왜적을 물리쳤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발탁하여

우병사를 삼았다. 그는 병으로 싸움터에서 사망하였다.

류종개는 의병을 일으킨 지오래 되지 않아 왜적을 만나 싸우다가 전사하였는데,

조정에서는 그 뜻을 가상하게 여겨 예조참의禮曹參議를 추증하였다.

장사진 전후前後에 왜적의 군사를 쏘아 죽인 것이 매우 많았는데, 왜적들은 그를

장장군張將軍이라고 칭하면서 감히 군위軍威의 경계에는 들어오지 못하였다. 그런데

하루는 왜적들이 복병을 설치하고 그를 유인하였다. 장사진은 왜적을 끝까지 쫓아

가다가 그 복병 속에 빠져들어 갔다. 그래도 그는 큰소리로 부르짖으며 힘써 싸

우다가 화살이 다 떨어졌다. 왜적들은 달려들어 장사진의 한 팔을 끊었으나, 그는

남은 한 팔 만으로 힘써 싸우기를 마지않다가 드디어는 전사하였다. 이 사실이

임금에게 알려지자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를 추증하였다.

충청도忠淸道에서 활약했던 사람은 중[僧] 영규靈圭258)와 전 도독관前都督官조헌趙

憲259)과 전 청주목사前淸州牧使김홍민金弘敏과 서얼庶孼이산겸李山謙과 사인士人박춘

무朴春茂와 충주인忠州人조덕공趙德恭과 내금위內禁衛조웅趙雄과 청주인淸州人이봉李逢

이었다.

영규靈圭는 용맹과 힘이 있어 싸움을 잘 하였다는데,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거

느리고 청주淸州를 회복하였으나, 뒤에 왜적과 금산에서 싸우다가 패하여 다 전사

하였다.

조웅趙雄은 더욱 용감하여 능히 말 위에 일어서서 달렸고, 왜적을 죽인 것이 자

못 많았으나 전사하였다.

경기도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사람은 전 사간前司諫우성전禹性傳260)과 전정前正정

숙하鄭叔夏와 수원인水原人최흘崔屹과 고양인高陽人진사進士이노李魯․ 이산휘李山輝와

전 목사前牧使남언경南彦經과 유학幼學김탁金琢과 전 정랑前正郞유대진兪大進과 충의

위忠義衛이질李軼과 서얼庶孼홍계남洪季男261)과 사인士人왕옥王玉이었다.

이 중에서 홍계남이 가장 날래고 용감하였고, 그 나머지 사람은 각각 향리鄕里에

서 혹은 백여 명, 혹은 수십 명을 모아 거느리고 의병義兵이라 이름한 자로 그 수

를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기록할 만한 공적은 없었으며, 다 이리저리 옮겨 다

니면서 시일만 보낼 따름이었다.

또 중[僧]으로 유정惟政262)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금강산金剛山표훈사表訓寺에

있었다. 왜적들이 이 산속으로 들어오자 절에 있던 중들은 다 도망하였으나 유정惟政

은 조금도 움직이지 않으니, 왜적들은 감히 가까이 오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합장을

하고 공경하는 뜻을 표현하면서 가버렸다.

내[柳成龍]가 안주安州에 있으면서 공문을 사방으로 보내 각각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구하러 나오라고 하였는데, 그 공문이 금강산 안에까지 이르자, 유정惟政

은 그 공문을 불탁佛卓위에 펴 놓고 여러 중들을 불러 놓고 이를 읽으며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그는 드디어 승군僧軍을 일으켜 거느리고 서쪽으로 달려와서 국난

을 구하려 힘썼는데, 그가 평양平壤에 올 무렵에는 그 무리가 천여 명이나 되었

다. 유정은 평양의 동쪽에 주둔하고 순안順安에 있던 관군과 함께 굳건한 형세를

만들었다.

또 종실宗室의 호성감浩城監은 백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행재소로 달려가니, 조

정에서는 그의 벼슬을 올려 호성도정湖城都正으로 삼아 순안順安에 주둔하여 대군大

軍과 합세하도록 하였다.

북도北道(함경도咸鏡道)에 있으면서 활약했던 사람은 평사評事정문부鄭文孚263)와 훈

융첨사訓戎僉使고경민高敬民의 공이 가장 뛰어났다.

 

 

252) 義兵: 나라가 위태로울 때 정부의 명령이나 소집을 기다리지 않고 자발적으로 일어나 싸우던 민

병. 임진왜란 때 그 활약이 매우 컸다.

253) 金千鎰(1537~1593) : 조선조 선조 때 의병장.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시호는 충장(忠

壯), 본관은 언양(彦陽). 삼장사(三壯士)의 한 사람. 임진왜란 때 전라도 나주(羅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원성을 거쳐 강화도로 들어감. 그 뒤 진주성 싸움에서 왜적을 무찌르다가 순사함

254) 高敬命(1533~1592) : 조선조 선조 때 의병장.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시호는 충장(忠

壯), 본관은 장흥(長興). 삼장사(三壯士)의 한 사람. 임진왜란 때 전라도 나주(羅州)에서 의병을

일으켜 수원성을 거쳐 강화도로 들어감. 그 뒤 진주성 싸움에서 왜적을 무찌르다가 순사함

255) 郭再祐(1522~1619) : 조선조 선조 때 의병장. 자는 이원(李綏), 호는 망우당(忘憂堂), 시호는 충익

(忠翼), 본관은 해주(海州). 임진왜란 때 의령에서 의병을 일으켰는데, 왜적들이 가장 두려워하였

고, 항상 붉은 옷을 입고 다녔으므로 천강홍의장군(天降紅衣將軍)이라 불렀다.

256) 金沔(1541~1593) : 조선조 선조 때의 의병장. 자는 지해(志海), 호는 송암(松菴), 본관은 고령(高

靈). 임진왜란 때 거창 ․ 고령 등지에서 의병을 일으켜 거창 우척현에서 왜적을 파하여 공을 세우

고 합천군수가 되고, 의병대장의 호를 받았다.

257) 鄭仁弘(1535~1622) : 조선조 선조 때 문신. 자는 덕원(德遠), 호는 내암(萊菴), 본관은 서산(瑞山).

임진왜란 때 합천에서 의병을 일으킴

258) 靈圭(?~1592) : 조선조 선조 때 승병장. 성은 박씨, 호는 기허(騎虛), 본관은 밀양(密陽). 임진왜란

때 조헌(趙憲)과 함께 의병을 거느리고 왜적과 싸워 청주를 수복하고, 금산에서 싸우다가 칠백

의사와 함께 전사함

259) 趙憲(1544~1592) :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의병장.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 본관은 백

천(白川). 문과에 급제하여 좌랑 ․ 현감 등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에는 승(僧) 영규(靈圭)와 함께

칠백 의사를 거느리고 금산에서 왜적을 무찌르다가 전사함

260) 禹性傳(1542~1592) :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의병장. 자는 경선(景善), 호는 추연(秋淵), 본관은

단양(丹陽). 문과에 급제함. 임진왜란 때 경기도에서 의병을 일으켜 추의군(秋義軍)이라 이름하

고, 왜적과 싸워 많은 공을 세우고 벼슬이 대사성에 이름

261) 洪季男(?~?) : 조선조 선조 때의 문신. 본관은 남양(南陽). 임진왜란 때 아버지 홍언수(洪彦秀)를 따라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르는데 공이 컸고, 아버지가 전사한 뒤에는 경기조방장으로 활약이 컸다.

262) 惟政(1544~1610) : 조선조 선조 때 의병장. 호는 사명당(泗溟堂) ․ 송운(松雲), 속성(俗姓)은 임씨,

자는 이환(離幻), 우정은 법명, 본관은 풍천(豊川). 임진왜란 때 승군을 거느리고 순안으로 가서

서산대사의 휘하에서 활약하고, 체찰사 류성룡을 따라 명나라 군사와 협력하여 평양을 수복하고,

일본과의 강화에 힘쓰는 등 많은 공을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