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애 류성룡

국역 징비록

49. 왜적들은 바닷가에 진을 치고 진주성晉州城을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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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1-09-03 오후 12:50: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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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적들은 물러가서 바닷가에 나누어 진을 쳤다. 그들은 울산蔚山의 서생포西生捕

로부터 동래東萊․ 김해金海․ 웅천熊川․ 거제巨濟에 이르기까지 머리와 꼬리가 서로 이

어졌는데, 무릇 16둔진이나 되었고, 이들은 다 산과 바다에 의지하여 성을 쌓고

참호를 파고는 오래도록 머무를 계획을 마련하며, 바다를 건너 돌아가기를 좋아하

지 않았다.

명나라 조정에서는 또 사천총병泗川總兵유정劉綎30)으로 하여금 복건福建․ 서촉西蜀

․ 남만南蠻등지에서 모집한 군사 5천명을 거느리고 계속 나와서 성주星州․ 팔거八莒

에 주둔하게 하고, 남장南將오유충吳惟忠은 선산善山․ 봉계鳳溪에 주둔하게 하고, 이

영李寧․ 조승훈祖承訓․ 갈봉하葛逢夏는 거창居昌에 주둔하게 하고, 낙상지駱尙志․ 왕필적王

必迪은 경주慶州에 주둔하게 하였는데, 사면으로 둘러싸고 서로 버티기만 하며 진격

하지 않았다. 그들의 군량은 호서지방과 호남지방[兩湖]에서 가져왔는데, 험준한

산길을 넘어 와서 여러 진둔으로 나눠 공급하게 되니 백성들의 힘이 더욱 곤궁하

여졌다.

제독(이여송)은 심유경沈惟敬으로 하여금 가서 왜적을 타일러 바다를 건너가게 하라

고 하였다. 그는 또 서일관徐一貫․ 사용재謝用梓로 하여금 낭고야浪古耶(고명옥古名屋)로 들

어가서 관백關白(풍신수길豐臣秀吉)을 만나보게 하였다.

6월에 왜적은 비로소 두 분 왕자님 임해군臨海君․ 순화군順和君과 재신宰臣황정욱

黃廷彧․ 황혁黃赫등을 돌려보내고, 심유경으로 하여금 돌아가서 보고하게 하였다.

그리고 한편으로 왜적은 나아가 진주성을 포위하고 “지난해 싸움에 패한 원수

를 갚겠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이는 대개 왜적이 임진년王辰年(1592)에 진주를 포

위하였으나, 목사牧使김시민金時敏이 이를 잘 막아내어 패배하고 물러갔던 까닭으

로 그렇게 말한 것이었다.

진주성은 왜적이 포위한 지 8일 만에 함락되었는데, 목사牧使서예원徐禮元․ 판관

判官성수경成守璟31) ․ 창의사倡義使김천일金千鎰․ 경상병사[本道兵使] 최경회崔慶會32) ․ 충

청병사忠淸兵使황진黃進33) ․ 의병복수장義兵復讎將고종후高從厚등이 다전사하고, 군인

과 백성 6만여 명이 죽고, 닭 ․ 개 짐승들까지도 남지 않았다. 왜적들은 성을 무너

뜨리고 참호를 메우고 우물을 묻고 나무를 베어 버리는 등의 만행으로 지난해 패

전했던 분풀이를 제멋대로 하였는데, 이때가 6월 28일이었다.

이보다 먼저 조정에서는 왜적이 남하하였다는 말을 듣고 연달아 왕명을 내리고

여러 장수들을 독려하여 왜적을 추격하게 하였다. 도원수都元帥김명원金命元․ 순찰

사巡察使권율權慄이하 관군과 의병은 다 의령宜寧에 모였다. 이때 권율은 행주幸州

싸움에 이긴 데 자신을 가지고 기강岐江을 건너 앞으로 나아가 치려하였다. 곽재우

郭再祐․ 고언백高彥伯은 말하기를,

“왜적의 세력은 바야흐로 강성한데 우리 군사들은 쓸모없는 군사들[烏合]이 많아

서 싸움을 감당해 낼 만한 사람이 적으며, 앞길에는 또 군량도 없으니 경솔하게

진격하여서는 안 됩니다.”

하자. 다른 사람들도 머뭇거릴 따름이었다. 이빈李薲의 종사관[從事] 성호선成好善34)

은 어리석어 사세를 똑똑히 판단하지도 못하면서 팔을 휘두르면서 여러 장수들이 머

뭇거리는 것을 책망하였다. 그는 권율과 의논이 맞아 드디어는 군사를 거느리고 기강

을 건너 나아가 함안咸安에 이르렀는데, 성은 텅 비어 아무것도 얻을 것이 없었다. 그

래서 모든 군사들은 식사를 못하고 익지도 않은 푸른 감을 따서 먹었으니 다시 싸울

마음조차 없어졌다.

그 다음날 첩자가 “왜적들이 김해金海로부터 크게 오고 있다.”고 알려왔다. 이때

사람들 중에 어떤 사람은 “마땅히 함안咸安을지켜야 한다.”고도 하고, 어떤 사람은

“물러가서 정진鼎津을 지켜야 한다.”는 등으로 의논이 분분해서 결정을 짓지 못하

고 있었는데, 왜적의 포 소리가 들려오자, 사람들의 마음이 흉흉하고 두려워하여

앞을 다투어 성 밖으로 나가다가 적교吊橋35)에서 떨어져서 죽는 사람이 많았다.

이렇게 하며 돌아와 정진穽津을 건너 바라보니 왜적들은 강물과 육지로부터 몰려

오는데, 들판을 덮고 강물을 메워 덤벼들므로 여러 장수들은 그만 저마다 흩어져

달아나 버렸다. 권율權慄․ 김명원金命元․ 이빈李薲․ 최원崔遠등은 먼저 전라도全羅道를

향하여 가고, 오직 김천일金千鎰․ 최경회崔慶會․ 황진黃進등은 진주晉州로 들어갔는데,

왜적은 뒤따라 와서 성을 포위하였다.

진주 목사牧使서예원徐禮元과 판관判官성수경成守璟은 명나라 장수의 지대차사원支

待差使員36)이기 때문에, 오랫동안 상주尙州에 있다가 왜적들이 진주로 향하였다는

말을 듣고 크게 낭패하여 돌아왔는데 겨우 2일 뒤에 왜적이 쳐들어온 것이다.

진주성은 본래 사면이 험준한 곳에 의거하여 있었는데, 임진년王辰年(1592)에 동

쪽으로 내려다 평지에 옮겨 쌓았다.

이때에 왜적들은 비루飛樓37) 여덟 개를 세워 놓고 그 위로 올라가서 성 안을 내

려다보며 칠 수 있게 하였다. 그리고 성 밖의 대밭에서 대를 베어다가 큰 다발

을 만들어 둘러 가리워 시석矢石을 막게 하고, 그 안에서 조총鳥銃을 빗발치듯 쏘

았으므로, 성 안의 사람들은 감히 밖으로 머리를 내놓지도 못하였다. 또 김천일金

千鎰이 거느린 군사들은 다 서울의 시정市井에서 불러 모아온 무리들이고, 김천일

또한 전쟁에 관한 일을 알지 못하면서도 자기의 고집이 너무 심하였다. 또 그는

평소에 서예원徐禮元을 미워하여 주인과 나그네 사이에 서로 시기를 하는 터였으므

로 호령이 어긋나니, 이로 해서 더욱 패하였던 것이다.

오직 황진黃進은 동쪽 성을 지켜, 며칠 동안 싸우다가 날아오는 총알에 맞아서

전사하였다. 이때 군인들은 기운이 빠지고 그리고 밖에서 돕는 군사도 오지 않았

는데, 마침 비가 와서 성이 무너지니 왜적들이 개미떼처럼 기어 들어왔다. 성안

사람들은 가시나무를 묶어세우고 돌을 던지며 힘을 다하여 막아내어 왜적이 거의

물러갔는데, 이때 김천일이 거느린 군사는 북쪽문을 지키다가 성이 이미 함락된

것으로 생각하고 먼저 무너져 버렸다. 왜적은 산 위에 있다가 우리 군사들이 무너

지는 것을 바라보고 일제히 성으로 기어오르니, 여러 군사들이 크게 어지러워졌다.

이때 김천일金千鎰은 촉석루矗石樓38)에 있다가 최경회崔慶會와 함께 손을 붙들고 통

곡하면서 강물로 뛰어들어 죽었는데, 군사나 백성들로서 성안에서 빠져나와 살아

난 사람은 몇 사람뿐이었다. 왜적의 반란이 일어난 이래 사람이 죽은 것이 이 싸

움처럼 심한 것이 없었다.

조정에서는 김천일이 의를 위하여 죽었다고 해서 벼슬을 높여 의정부우찬성議政府右

贊成을 추증하였다. 그리고 또 권율權慄이 용감하게 싸우며 왜적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고 해서 김명원金命元을 대신하여 도원수都元帥로 삼았다.

명나라 장수인 총병總兵유정劉綎은 진주성이 함락되었다는 말을 듣고 팔거八莒로

부터 합천陜川으로 달려가고, 오유충吳惟忠은 봉계鳳溪로부터 초계草溪에 이르러 경상

우도[右道]를 수호하였다.

한편 왜적들도 역시 진주晉州를 쳐부수고 난 뒤에는 부산釜山으로 돌아가서, 명나

라 조정에서 강화를 허락하는 것을 기다려 바다를 건너 돌아가겠다는 소문을 퍼

뜨렸다.

 

 

30) 劉綎: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는 구원하러 왔던 명나라 장수

31) 成守璟(?~1593) : 조선조 선조 때의 문관. 본관은 창녕(昌寧). 임진왜란 때 진주판관으로 김천일(金

千鎰) 등과 함께 진주성을 지키다가 전사함

32) 崔慶會(1532~1593) : 조선조 선조 때 무신. 자는 선우(善遇), 호는 삼계(三溪), 시호는 충의(忠毅),

본관은 해주(海州).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각처에서 왜적을 쳐부수고, 경

상우병사가 되어 김천일 등과 함께 진주성에서 왜적을 막다가 전사함

33) 黃進(?~1593) : 조선조 선조 때 무신. 자는 명보(明甫), 호는 아술당(蛾述堂), 본관은 장수(長水). 무

과에 급제, 임진왜란 때 근왕병을 모집하여 각처에서 왜적을 격파하고, 충청병사가 되어 진주성

에서 왜적을 막다가 전사함

34) 成好善(1552~?) : 조선조 중기의 무신. 자는 칙우(則優), 호는 월사(月蓑), 본관은 창녕(昌寧). 선조

때 문과에 급제, 임진왜란 때 순변사 이빈(李薲)의 종사관으로 일하고 뒤에 충주목사가 되었다.

35) 吊橋: 성이나 참호 위에 설치하는 다리. 밧줄이나 쇠사슬로 매어 내리게 만든 것

36) 支待差使員: 식사나 용품을 공급하는 소임을 맡은 임시직

37) 飛樓: 높게 만든 다락. 성을 공격할 때 성에 기대놓고 오르게 만든 공성기구(攻城器具)

38) 矗石樓: 진주에 있는 누각